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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혜경, 〈묘묘〉: 신화적 존재 넘나들기
    REVIEW/Dance 2026. 9. 13. 19:44

    기이함을 표방하는 하이브리드

     

    김혜경, 〈묘묘〉[사진 제공=세종문화회관](이하 상동).

    〈묘묘: 고양이 무덤〉(이하 〈묘묘〉)에는 허공에 걸린 여러 하얀색/투명한 커다란 주머니들이 오르내리면서 그 안에 든 다양한 소품들을 끄집어 내 활용하는 것과 같이, 포화되는 여러 에피소드를 (물리적으로) 응축, (심층적으로) 함축하고 있으며, 각 장은 이 물리적인 설치미술적 양태에 입각해 각기 다른 양상의 수행성을 띤 행위로 분화되어 가는 한편, 어떤 구심점 없는, 서사의 위계 없는 차원에서 덜그럭거린다.

     

    곧 〈묘묘〉는 여러 서사가 모호하고도 불명료한 채 섞이는데, 이러한 혼성물로서 기초는 단락되면서 전체 또는 종합으로서 산출을 방해한다. 그 가운데서도 분명한 것이 있다면 김혜경은 계속해서 고양이를 의태하며, 그로써 고양이라는 상징적 표지를 기필코 기입하고자 하는 부분이겠다. 그런데 동물을 모방하는 것, 동물-되기의 차원을 가져가는 건 여성적인 것이라는 상징성과 접변되어 있으며, 이로써 여성적인 굴레를 시험하는 것이 된다.

     

    가령 가슴에 붙인 보라색 패치, 하얀색 팬티, 보라색 구두는 쉬이 란제리 모델의 성적 대상화를 상기시키며, 아마도 가장 길고도 강렬한 장면, 조명으로 정방형을 그린 무대를 따라 시계 방향으로 단독으로 도는 김혜경이 고양이가 되어 가는 순간으로 이어지는 이 과정은, 그가 이족 보행을 힘겹게 유지하다 사족 보행을 하는 고양이로 변태하는 흐름이라 할 수 있으며, 그와 동시에 여성적인 것에 대한 강요가 주는 억압 기제를 설파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그러니까 그것은 물론 의도된 메시지로 정형된다기보다 그가 인간학적인 무엇을 과잉으로 들여올 때, 왜 그것이 고양이와 절합되고 있는지를 살피는 차원에서, 생명 존중 사상의 차원이 페미니즘적 의제, 가령 패션 모델의 정동 노동에서의 소진과 그것을 타자성으로 갈음되는 것으로 분화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전의식적인…

     

    가령 이 과정에서 김혜경은 그는 하이힐을 벗어 들어 두 손에 들고 고양이 앞발을 묘사한다. 그런데 이는 구걸하고 애원하는 타동적 제스처로도 읽히며, 인간에 대한 동물의 눈빛이기도 하지만, 인간에 대한 인간의 위계를 향하는 양가적인 도상을 형성한다.

    곧 페미니즘적 의제가 직접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페미니즘이 타자에 대한 열림의 태도를 담지한다는 교차성의 근거 차원에서 이를 가늠해 본다면, 부차적이지만 합목적적인 차원에서 페미니즘과의 상관관계를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묘묘〉는 무의식적이기보다 전의식적이거나 비의식적이다. 매달린 주머니들은 무언가를 담고/감추고 있지만, 그것이 곧 풀리는 걸 예기한다. 포장은 전적으로 끄르는 것에 대응하며, 가시화되거나 그렇지 않을 뿐이다. 처음, 임소정과 김혜윤의 파편적 행위들은 불안정하면서도 정위되지 않으며 그저 분열적 차원을 띨 뿐인데, 이는 잠재적 차원에서 어떤 본격적인 것 이전의 것이면서 욕망이 아직 발화되지 않은 소극의 양상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는 고양이의 분절화된 행동들, 어떤 분명한 목적 아래, 의식 아래 무언가가 행해지지 않으며, 본능적으로 일종의 소일거리를 단속적으로 취하는 행위 양상들을 의태한 결과이다. 그러니까 역설적이지만 욕망을 감춘 부르주아 계층의 멜로드라마로 번역될 첫 장면은, 기실 고양이라는 다른 종, 계급을 서술하는 새로운 서사의 내용이다. 그것이 물론 부르주아 욕망을 투사하여 만들어진 풍자적 부조리극의 외양이라고 한 번 더 꼬아서 생각하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그럼에도 먼저 〈묘묘〉가 어떤 의도에서 만들어지는 작업인지를 가늠해 보는 건 중요하다. 김혜경은 어릴 적 고양이를 포함해, 상대적으로 작고 연약한 동물들의 고통과 상처, 죽음에 대처했던 경험이 극 전체를 관통한다고 할 것인데, 이는 후반, 상수 안쪽 구석에서 작은 테이블 위의 토마토들을 꿰매는 김혜경의 모습에서 뒤늦게 ‘봉합’된다.

     

    타자성의 경합

     

    〈묘묘〉가 한층 더 기괴해지는 건 고양이를 표현 방식의 주요한 한 축으로 상정하면서 그것이 여성의 타자적 지위와 연결되는 부분이 전적인 패션의 차원에서 자본주의적 속성을 비판 없이 허용한다는 부분이다. 가령 레오타드에 뾰족구두를 신는 것이 동물적 변용의 상태를 가리키기 전에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까 〈묘묘〉는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취한다.

     

    그런데 이는 고양이 신체의 뭉개짐이라는 원-체험적 장면은 마침내 김혜윤이 하수 쪽 천장에 딱 하나 걸려 있던 투명 주머니를 열어 그 안의 토마토들을 쥐고 터뜨리는 행위로 발현되고, 김혜경은 이에 무심하게도 (보지 않고) 앞선 토마토 꿰매기를 시현하고 임소정은 테이블 중앙의 수정구에 토마토 과즙을 붓으로 찍어 바르는 동작을 하는데, 이는 음악적 이화 효과 안에서 다소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풍긴다.

     

    극적으로는 정체된 구간의 양상으로, 두 축의 진행이 연루되기보다 비켜 나간다. 의도적인 물리적 거리가 시간적 간극으로 연장됨으로써 움직임의 경합이 아닌, 경합으로서의 서사가 이뤄진다. 곧 두 개의 행위 축은 빗나간 시간이자 환상적 시간을 한 번에 조각하면서 두 개의 시간이 인과관계가 아니라 선후 관계의 차원임을 명시함으로써 퍼포먼스보다 퍼포먼스를 경유한 극의 시간을 상정한다.

     

    실험실의 과학적 운용으로서 치유는 순수한 움직임이 아닌, 연극적 스타일의 차원 아래 놓이는데, 이는 왜상에 대한 외면과 거리 두기의 차원에서 그러하다고 보인다. 김혜경은 죽음(충동) 이후에 세계가 어떻게 하나의 몸으로 합성되(었)는지를 보여주려는 듯 보인다. 그것은 애도 불가능한 사태를 해소하기보다 동거하는 상태를 보여준다. 환유는 다시 말해 은유의 오해를 부르지만, 김혜경은 끊임없이 먹어치운다. 절합되고 합성된다.

     

    과거와의 공모

     

    곧 토마토를 죽은 고양이 시체를 만지듯 하여 붉게 물들일 때처럼 토마토는 고양이를 환유한다. 또한 토마토는 이미 다른 것을 환유한다. 안은미의 ‘무덤 연작 시리즈’ 중 ‘토마토 무덤’에 대한 참조로서 그러하다. 토마토를 권하며 “은미 먹어”로 자신의 스승을 지칭할 때 객석에서는 “김혜경, 너나 먹어!”라고 아마도 안은미가 받아친다.

     

    이후 안은미의 초상 포스터를 얼굴 앞에 두고 안은미가 되었다가 그것을 보란듯이 찢어발기는 것으로써 스승이라는 무덤을 구성해 그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솟아 나오며 동시에 자신을 찾는 이미지를 연출한다. 그렇다면 피의 전조는 곧 스승에 대한 살해, 살불살조의 이념을 선취했던 셈이기도 하지만, 이 앞선 일종의 짜고 친 횡단은 참조를 허락하고 그 길을 응원해준 스승의 지지와 연루를 오히려 가시화하고, 스승은 곧 승화된다.

     

    그런데 과거를 빌려온다는 점에서만 공통적으로 보이는 이 ‘토마토 무덤’은 아마도 2009년 당시에는 관객을 직접 향하며 전위의 상징성으로 읽혔을 터인 데 반해, 〈묘묘〉에서 이는 전면화되기보다 애도의 차원과 거리를 형성하면서 그 거리 자체로서 쓰인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참조되고, 관찰자의 시점으로 옮겨간다. 그렇다면 과거의 고양이와 과거의 안은미는 타자성의 견지에서 김혜경의 시점에서 상호 함입되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묘묘〉는 무언가를 계속 섭취해 나간다. 무언가의 들러붙음은 나의 비대한 자아를 확인시키는 차원이라기보다 나의 타자성을 확장하는 길이며 그 안에서 그것들을 구분 짓지 않고 엮어 나간다. 이는 그리고 무대 위에 걸려 있다 하나씩 내려오는, 그때마다 다른 이야기 보따리를 푸는 무대 구성 측면과 조응하지 않는가. 이는 서사의 위계를 가져가지 않으면서 동시에 서사의 구조적 차원의 배열 자체를 불가능하게 한다.

     

    설치미술적 연장

     

    〈묘묘〉의 무대는 극장 입구에 닫힌 별도의 통로 공간―F.O.H―의 천장에 걸린 하얀 레이스 등을 입은 두꺼운 배관들은 마치 고양이 내장 다발 같으며, 그리고 입구의 스피드게이드 한 축 자체를 막고 있는 여러 색의 옷가지들은 고양이의 터전 같거나 고양이 무덤을 환유하는데, 전체적으로 무대 위에 걸린 커다란 종유석 같은 주머니들과 같이 이 모든 것은 난삽하고 또 의도적으로 그러하다.

     

    그리고 무대 옆 통로를 따라 놓이는 길게 딴 검은 머리-줄은 일종의 고양이 꼬리를 환유하면서 그 끝에 짐작할 수 없을 만한 존재가 있으리라는 예감을 주는데, 여기서 인간의 머리카락, 패션의 일부가 다른 종의 몸 일부가 되는 중첩됨의 상상력 자체가 앞서 말한 것처럼 〈묘묘〉를 지배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처음 등장에서부터 분절적 양태가 고양이를 ‘더’ 의태하는 임소정과 ‘덜’ 의태하며 인간적인, 그리고 마침내 토마토 무덤 장면에서 실존주의적 형상으로 갈음되는 김혜윤, 그 둘의 뒤에 김혜경이 등장하곤 하는데, 이 셋은 관계 지향적이 아니라 개체 발생적이며, 그 가운데서도 극을 지배하며 은밀하게 무언가를 다 알고 있는 건 김혜경이다.

     

    이 지점에서 일정한 결에 입각한 다채로운 의상 아래 색상 차로 주로 구분되는 셋의 양상에서, 다른 둘은 다소 부차적으로 등장한다고도 하겠다. 그렇다고 김혜경이 더 많은 걸 명시한다고 보기도 힘든데, 모든 것은 ‘묘한’ 상태의 자장 아래 있는 것이다. 서사 전개는 다소 사건적이면서도 미스터리하며, 그렇다고 장르물 역시 아니지만, 그 서사의 중의성으로 인해 정합될 수 있는 차원도 아니다.

     

    김혜경이라는 신화

     

    헐벗은 김혜경의 몸이 말하는 건 새삼 더 복잡한데, 그가 앞서 정방향 공간을 돌 때 나오는 〈La Vie en Rose〉를 연주 없이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는 더 신체적이며 김혜경을 직접 어루만진다는 느낌을 준다. 이때 낯선 신체성이 김혜경을 마주하면서 끝나지 않는 노래를 이어가며 이 닫힌 피드백 루프에 타당성을 실어주는데, 연인을 향한 노래 가사의 구체성보다는 그 실제적 관계성이 우선한다고 하겠다.

     

    이때 김혜경의 몸 자체는 퍼포먼스 자체이면서 또한 신화화되는데, 노래의 원곡자, 에디트 피아프(Édith Piaf, 1915-1963)의 파란만장한 삶 자체의 맥락이 김혜경을 경유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그의 실 다발같이 직조된 등근육이라든가 군살 없이 파인 몸 전체는 김혜경의 무용 인생 자체를 돌아보며 찬복케 하는 신화적 코드를 결정적으로 내포하는데, 그것이 곧 ‘장밋빛 인생’, 어떤 환상성을 입은 존재가 된다.

     

    그러니까 고양이-인간의 절합된 연기 양식을 표현하는 김혜경의 몸 자체가 실은 2차적 코드이자 진정한 내용이며, 그를 진정성 있는 무용수로 치환한다. 그는 노래를 부르는 이가 아니라 노래를 충분히 바칠 수 있는 존재이며, 실은 노래를 부르는 주인공의 신체 자체이다. 남자의 목소리가 그를 애무할 때, 그는 노래와 동기화되지 않고, 어쩌면 링 안의 고양이라는 지위로 축소된다.

     

    그렇지만 결국 김혜경은 남자와 동기화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남자가 에디트 피아프의 자리를 점유할 수 없기 때문에 김혜경은 에디트 피아프와 친연하며, 노래의 메시지가 아니라 노래의 신화성 자체가 김혜경을 통해 발현된다. 그리고 노래 자체가 그 노래의 소유자, 그의 실제의 삶으로 소급되며 그 자신을 향해 바치는 헌사로 재정렬된다. ‘남자의 헐벗은 신체성’은 그 노래 자체가 자신으로부터 꺼내어져 자신을 향한다.

     

    그리고 이것이 에디트 피아프-김혜경을 관통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 김혜경은 인간에서 고양이를 횡단하며,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김혜경의 신체 자체를 가시화한다. 관객은 그것을 관통한다. 곧 유일한 신체성으로의 환원이다. 김혜경은 그 안에 심취해 있다. 또는 갇혀 있다. 이는 김혜경 자신의 신화적 이미지에의 무력한 종속인가, 여성의 성적 대상화 자체에 대한 불편함까지의 가시화인가, 고양이라는 타자적 존재의 무력한 신체성을 체현하는 것인가.

     

    〈묘묘〉의 확장성

     

    아마도 그 셋 전부이기도 또 모두 아니기도 할 것인데, 〈묘묘〉의 애매모호함이 곧 거기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김혜경이라는 인물을 신화적 차원에서 가시화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타자성의 세계를 구성하고자 하며, 또 다른 축에서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전면에 내세우며 적극 활용하는 가운데 일부 소진된 여성 신체의 실재성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니까 김혜경은 너무 많은 것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그 가운데 정확하게 어떤 하나만을 더 말하고 있지는 않은데, 이는 그가 어떤 역할을 구성하기보다 (또한 구성할 수 있기보다) 김혜경 자체가 하나의 역할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극에 자신을 자연스럽게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곧 김혜경은 무엇보다 ‘김혜경’인데, 가령 김혜경이 안은미컴퍼니의 여러 공연에 출연할 때 홍일점같이 홀로 두드러지는 사태가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며, 이는 공연 외적으로 김혜경이라는 캐릭터를 따로 성립시키는 부분이다.

     

    〈묘묘〉는 고양이에 대한 애도로서 행위가 승화보다는 고착된 양태로, 무시간성의 그림자로 나타난다―사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묘묘〉는 설치미술적 퍼포먼스의 단편들을 시간예술로 묶어 놓은 것에 가깝다. 타자성이 침투한 세계의 재배치 구조 속에서, 인물들은 패션쇼의 모델이기도 하며, 가발의 머리 털을 정면을 응시한 채 스스로 빗는 성애적 행동이 고양이의 그루밍을 분명 초과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 양태는 분명 여성 섹슈얼리티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니까 〈묘묘〉는 작품 내재적인 비평보다는 신화적 기전의 내외부를 함께 복합적으로 넘나들며 살펴봐야 함이 필요하다. 그 지점에서 고양이 자체보다는 고양이스러운 무언가의 존재들이 보여주는 이미지가 무엇을 향하는지를 궁구해야 할 작품이라 하겠다. 그것은 고양이라는 타자성이 그 자체로 자율적이기보다 또 다른 타자성의 존재로 흡수되는 과정이라고도 하겠다.

     

    김민관 편집장

     

    2026.08.21(금) 1회차 19:30 / 08.22(토) 1회차 / 19:30 08.24(월) 1회차 19:30

     

    • 안무 김혜경
    • 출연 김혜경, 김혜윤, 임소정
    • 음악 Nosaj Thing(노사즈 씽)
    • 의상 디자인 발코
    • 음향 디자인 이효원
    • 조명 디자인 장진영
    • 무대·의상 제작 윤관디자인
    • 무대 오브제 제작 이형주
    • 메타-드라마투르그 임근준(이정우)
    • 프로덕션 매니저 김성빈
    • 기술감독 김지명
    • 제작 PD 박선미
    • 제작 지원 안은미컴퍼니
    • 제작(재) 세종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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