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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덕호, 〈괸돌클럽〉: 타자로부터 ‘나’를 재활성하기
    REVIEW/Dance 2026. 10. 6. 19:32

    타자로부터

     

    길덕호, 〈괸돌클럽〉[사진 제공=길덕호](이하 상동).

    〈괸돌클럽〉은 길덕호가 2018년부터 강화도에서 만나온 노인들을 호명해 온다. 다큐멘터리 연극에서도 버바텀 연극의 양식이 주효하며, 노인 각각의 현존이 불거졌다 가라앉는 반복된 기술의 흐름이 그것을 지탱한다. 각각의 서사-모나드는 각자의 관심을 충족할 뿐이며, 유기적인 하나의 완성된 서사를 이루는 데는 무관심한데, 이 같은 엮는 방식의 종합, 엮는 방식으로써만 가능한 종합에 대해 어떻게 소명할 수 있을까.

     

    더 근본적으로 노인들의 이야기를 불러오는 것에 대한 의도 혹은 욕망, 그러니까 작품의 기저에는 무엇이 있을까. 종합의 틈새는 종합에의 틈새로부터(만 비로소) 드러나는데, 그것은 타자를 매개하는 것에 대한 충실함이 지속되는 순간을 벗어나, 그들을 상대하는 한 개인으로서 어떤 무(기)력함을 마주하는 순간으로, 악사 한 명―오선아―이 할머니-인형[이정자, 1945년생]에 대한 재현으로 자신을 대체해서 독립된 타자로 부상하는 순간이다.

     

    이는 여러모로 이전과는 다른 무대를 초과하는 기술 방식이며, 악사가 무대의 경계를 넘고, 인형이 악사의 몸을 넘고, 할머니가 길덕호라는 내부(로서 무대)를 넘는다. 이로부터 길덕호가 마주한 타자성의 존재가 갖는 효과가 관객에게 전이되는 효과가 발생하는데, 이때 길덕호는 상수 계단으로 오르는 독립된 벽에 등을 붙이고 그로기 상태에 빠진다. 자기의 연극을 만들어 달라는 할머니의 청은 그의 욕망과는 하등 상관없으며, 의무와 책임만을 절대적으로 요구한다.

     

    사실상 강화도의 고인돌을 가리키는 “무언가를 괴어두고 있는 돌”로서 ‘괸돌’은 그곳에 사는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지지하는 역할을 하는 길덕호 자신에 대한 비유가 된다. 죽음의 차원, 삶과 죽음의 경계 없음의 차원을 사고하는 존재, 독거노인으로 대부분 살아가는 삶의 방식 속에서 죽음과 함께 사라져 버릴 이야기들을 아카이브하고자 하는 열망이 바로 작품의 기저에 자리한다. 그런데 결국 그것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의 시효 역시 생각해야 하는 일 아닐까.

     

    그들을 반향한 ‘나’의 연극을 회수하기

     


    서사의 전달은 서사에 대한 전달의 의무를 이전한 것이지만, 사실상 길덕호의 속마음 효과인 악사들, 그중에서도 반복되는 “어이구, 내 팔자야!”라는 넋두리, 박두수의 추임새는 그들의 연극을 만들기 위한 지지체, 곧 괸돌이 되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조소적으로 표현한 것일 텐데, 사실상 노인들은 길덕호에 대한 요구만 있고 길덕호 자신이 무언가를 그들에게 관철시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연극이라는 것이 애초에 길덕호 자신이 비워지지만 길덕호의 연극이 되는 걸 상상했던 것이 아니라면, 그들‘의’ 연극과 그들‘에 대한’ 연극이 엄격하게는 다른 것이라면, 버바텀의 충실한 재현(성)이 타자에 대한 재현자의 윤리를 충족하는 차원에서(만 환상적으로) 긍정되는 것이라면, 애초에 타자의 자기 표현 욕망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 들어주기라는 보조 기술이 재현자로 전이될 때의 간극은, 재현의 간극보다는 더 큰 것 아닌가.

     

    따라서 〈괸돌클럽〉은 제각각의 고유성에 입각한 절대적인 존재의 호명 방식에 의해 마무리 지을 수 없는 극의 구조적 한계, 난관을 기이하고도 무모한 시도로써 돌파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일종의 2부 구조의 양식을 취하는 것이다. 그 사이에 앞선 의사-할머니의 난입이 있었던 것처럼, 2부는 길덕호가 아닌 실제 할머니들이 출현하는 그들만의 무대가 장소를 옮겨 공간 2층 별도의 공간에서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경험의 전수로서 이야기라는 방식은 존재를 보존하지만, 그 존재의 빈자리를, 동시에 (전수를 통해) 화자의 자리가 비워짐을 가정한다. 이야기는 죽음을, 그리고 그 화자의 죽음을 넘어선다. 그러니까 죽음을 죽음 직전의 황급한 개입으로서 삶의 마지막이 될, 삶의 마지막에 꺼내고자 하는 말들을 기록하는 그 행위에서 죽음을 경유할 수밖에 없는 길덕호의 멜랑콜리한 정서는, 그 역시 이야기의 힘 가운데서 사라져 갈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에 힘 입은 것이(겠)다.

     

    재현의 충실함을 위한, 재현 자체를 위한(?) 테크닉

     

    이야기하기로써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와 함께 사라져가는 것, 이야기와 상관없이 종래 사라지는 것, 곧 이야기는 죽음을 영속적으로 보존하는 것의 열망이 아니라, 죽음을 마주하며 말하는 것, 죽음충동에 대한 어떤 열망인 것이라면. 타자에 대한 매개의 곤궁이라고 생각되던 것이 단순히 타자에 대한 도덕적 강박의 보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을 바라보고 숙고하는 차원의 것이라면.

     

    곧 이야기 듣기가 삶의 소진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 위에 얹힌 삶에 불과한 것임을 수용하는 일이라면. 길덕호의 곤궁이 외부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내재적으로 분기되는 어떤 지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라면. 사실상 길덕호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여러 노인에 대한 핍진한 묘사의 기술을 가져가는 것은, 그의 연기 테크닉의 총체를 실험하는 것의 연장선상에서 살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파마 머리의 가발을 쓴 채 두꺼운 분장을 통해 나이를 가리기 위한 기술로서 그 나이를 짐작하게 하는 여성 노인의 기본 값을 갖고 있는 것에서 다양하게 분화하는 노인에 대한 표현은, 실상 그 각 노인에 대한 캐릭터성이 어떻게 연기로 치환되어 생생해지는지를 보는 것에 가깝기도 하다. 그러니까 핍진하다는 것 자체―실제 녹음된 것의 판본이 나중에 리믹스되어 재생됨에서 이를 일부 판별할 수도 있다.―가 배우의 기술이라면, 그것은 대상화의 위험을 벗어날 수 있을까.

     

    소소한 이야기들의 차원은 그 사람의 진정한 내부를 보여주는 것일까. 그것이 관찰자의 내부를 거치지 않고 따라서 그로부터 중요해지는 어떤 차원에 이르러 재결정되지 않고, 외양을 가져올 때에도 그것은 그 사람의 진실인 것인 동시에, 여전히 그것은 ‘덜’ 매개되며 그럼으로써 ‘더’ 매개된다는 논리 아래 재현의 윤리를 성취하는 것일까. 그러니까 애초에 유사한, 흡사한 것에 대한 의미는 재현의 윤리를 담보하기보다 명목을 충족시키는 용도 아닌가.

     

    타자에 뒤덮인 ‘나’라는 입구

     

    그것은 오히려 재현의 열망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 아닐까. 타자 안에 나를 소거한다는 착각, 타자와 나의 혼동으로 도피하기, 그리고 이것은 정확하게 전도된 욕망의 차원을 은폐하는 구조 또는 도착된 욕망의 논리를 은폐하는 형식 아닌가.

    곧 일종의 재현의 욕망 자체 혹은 재현의 윤리 자체보다 그것이 선행함을 부인하기 위해 재현의 틈은 기각되어야 한다라는 것. 그러니까 더 유사함으로써 타자를 대상화하지 않는다는 것이, 타자를 대상화하지 않는다는 방식 아니 윤리 자체를 말해줄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이 현존을 ‘투명하게’ 구가하고 있기 때문에 대상화가 아니게 되는 게 아니라, 거꾸로 그것이 그 자체로 재미있기 때문에, 투명하다고 믿어지면서도 여전히 그 안의 매개자의 의도가 모호하기 때문에, 알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매개자가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투명하기 때문에 (더더욱 매개자에 대해 알 수 없는 악화를 거듭하기 때문에) 적어도 대상화의 차원을 외양의 심급으로만 단정하기에는 다소 모호함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반면, 매개의 열망이 그 스스로 판단할 수 없는 지점에서 매개자를 옭아매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단정할 수 없다면, 여기서 그 옭아맴은 매개자의 열망 자체를 거꾸로 주조하기 때문에 대상화의 기전을 벗어날 수 있게 되는 듯 보인다. 그러니까 길덕호의 곤궁은 타자의 매개에 대한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의 매개로서 또한 자신이 존재한다는 부분에서 자기 윤리를 취하며, 상호 함입되는 지점에서의 대상화의 차원을 완수할 수 없게 된다는 지점에서 온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비로소 윤리적일 수 있다. 관객을 마주한 무대에서, 스페이스 빔 안의 또 다른 내부 공간인 미닫이 문의 문틀 프레임 안으로 비치는 방으로 옮겨가서, 작은 탁자를 비롯해 취미가 반영된 방 안에서 노인[왕영분, 1947년생]과 독대하며 길덕호가 무대를 이탈할 때 그리고 또 다른 무대 안 장면으로 삽입될 때 노인이 자신의 마지막 자리가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보여줄 수 있는” 무대는 미래의 자리가 아니라, 이미 길덕호의 자리로 도래해 있다.

     

    사라지(지 않)는 매개자

     

    따라서 길덕호는 미래의 손님을 함께 기다리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현재 그것을 앞서 체험하는, 바로 노인이 부재하는 그 자리에서의 손님이기도 하다. 길덕호는 단순히 노인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그의 외로움을 해소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을 준다기보다 그 노인의 죽음을 앞당겨 살아내는 가운데, 자신의 삶을 무겁지 않게 지속해 나가야 한다. 그는 존재와 연루되지만, 그 존재로부터 삶의 근본적 차원을 궁구해야 하고, 배우라는 역할을 고민해야 한다.

     

    2부는 이 길덕호가 처한 곤궁으로부터 벗어나는, 그들과 관객을 맞세움으로써 그 자신이 사라지는 매개자가 되는 시간이다. 이는 더는 배우의 테크닉이 기술적인 현존의 다양하고 현란한 완성의 차원으로써 지속할 수 없는 어떤 시점에 이르는, 개인적 윤리가 처한 막다른 길목에서의 재현‘에’의 한계로서, 그것은 재현의 불가능성을 맞닥뜨린 것이 아니라, 불가능성의 실재가 재현을 건너감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극작법적 기술은 우연하고도 자의적인 존재들 자체의 나열과 엮음의 과정에 수반되는 배치 정도였‘었어야 하’므로, 길덕호는 마치 공공적 차원의 장을 만드는 것으로 방향을 급격히 틀게 된다. 이는 안은미의 여러 프로젝트를 떠올리게 하는데, 멀게는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에서, 근래로는 〈둥실덩실〉[각주:1]이 그러하다.

     

    후자는 “시니어 여성”들의 워크숍을 경유해, 그들 각자가 자신의 무대와 발화의 자리를 돌아가며 갖는, 일종의 소개와 함께 한 명 한 명에 대한 고유성과 차이가 존중되는 무대로 진행되었는데, 〈괸돌클럽〉 역시 한 명씩 소개와 함께 누군가는 장기를 선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관객 역시 호명받게 되는데, 한 명씩 호명을 받을 때마다 현재의 공간을 떠나며, 마지막 순간에 관객이 공연에 기입되게 된다.

     

    상호 연루적 피드백 체제

     

    관객은 이제 2층 테라스 문을 나가 계단을 따라 1층의 일종의 백스테이지를 걸어나오며 참여진의 환호를 받게 된다. 일종의 통과의례는 끝과 새로운 시작을 맞물리게 하는 소소하고 투박한 이벤트 형식을 띠고 있다. 결과적으로, 1부와 2부는 전혀 다른 창작 방식을 취하는데, 이 둘의 분기는 주로 강화도 노인분들―2부에 등장한 사람들은 더 다양한 연령대를 소수 포함하고 있었다.―을 매개하기의 (재)의미화 과정이 매개하는 자의 곤궁으로 꺾이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그러니까 그들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는 시점에서 〈괸돌클럽〉과 공통되는 안은미의 여러 프로젝트들이 그들만의 정동을 무대에 전이시키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면, 따라서 그것이 그들만의 투명하고도 온전한 외양으로 비치게 만들고자 한다면, 〈괸돌클럽〉은 고군분투하는 창작자의 곤궁으로부터 이 과정이 순일하거나 원만하게만 진행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이는 결국 창작자 자신의 내재적 차원을 경유해, 타자성에 대한 관객 자신의 윤리를 먼저 점검하게 한다.

     

    곧 B, 곧 강화도 노인을 비추는 A, 곧 길덕호에서 B를 마주하는 C, 곧 관객이 다시 A에게 비쳐지면서 계속해서 발생하는 상호 연루의 차원이 하나의 사이클을 완성하게 된다. 1부와 2부는 대상적으로 또 형식적으로 완전히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건 피드백 체계의 구조 안으로 수렴한다.

    〈괸돌클럽〉은 연극을 하고 싶어 하는 노인들의 열망으로부터 이 극이 시작되었음을 처음에 전하지만, 그와 같은 열망의 충족을 위한 방식 대신에, 그들의 대상화(?)를 통해 연극을 시작한다.

     

    거기에는 길덕호의 그들의 매개뿐만 아니라, 매개의 책임과 의무에 대한 반응적 차원이 포함되어 있는데, 곧 노인들에 대한 연기는 노인들의 삶과 길덕호-관객 사이의 간극을 체현한다. 사실은 자기 재현의 방식으로서 연극이 비로소 사회적-공공적 차원의 의미를 띠고 발화하는 데 이르는 데에는 극작술이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객관화되지 않는

     

    그들이 길덕호에게 요구한 것이 단순히 연극이라는 외양일지라도, 실은 매개자-관찰자의 이야기의 객관화와 그 자신이 그것으로부터 의미를 먼저 찾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된다. 곧 길덕호 자신의 욕망을 관객의 차원을 경유해 충족시킬 것이 요청된다.

    따라서 〈괸돌클럽〉은 그들의 요청에 대한 길덕호의 반향 같은 것이며, 그것이 필연적으로 요청된다는 점에서, 구성적 차원에서 과정적 단계임을, 나아가 과정적 차원에서 구성되고 있는 단계로서 작업임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왜 연극인지, 연출가 역시 알지 못한다.”라는 길덕호의 말은 물론 〈괸돌클럽〉이 전혀 다른 새로운 형식의 작업이 출현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 작업이 그 자신을 초과하고 있으므로, 그 스스로는 정의내릴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과 같다. 이는 이 작업이 연극의 확장성을 기하고 있다는 것보다 연극을 초과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극단적으로 검토하자면, 〈괸돌클럽〉이 연극이 맞는지를 회부하거나 아니면 연극이라는 매체 자체를 성찰하는 지점에서 〈괸돌클럽〉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중핵이 되는 1부를 기준으로 해서, 전자의 연극의 소극적 정의 차원에서 다큐멘터리 연극이라고 규정한다면, 거기에는 역할에서 튕겨져 나가는 길덕호로 인해 봉합되지 않은 솔기가 생겨나는 가운데, 워크숍 연극으로 급격하게 전환되어 장르적 순일성을 갖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후자의 연극에 대한 적극적 정의 차원에서 커뮤니티 연극의 틀로 확장하여 그 가운데 다큐멘터리 연극이 일부 차용된 실험적 시도라고 본다고 해도, 그 둘의 분절과 간격은 해소되지 않은 과제로 남을 것이다.

     

    ‘나’를 재활성하기

     


    결과적으로, 〈괸돌클럽〉은 그들을 대하는 길덕호 자신의 다큐멘터리 연극에 가까우며, 여기서 재현은 그들의 삶이 길덕호에 남긴 인장들 자체를 현시하기 위한 측면에서, 재현의 핍진함은 길덕호가 느낀 강도 자체로 치환된다―동시에 그것의 합목적성은 길덕호가 느낀 강렬함이 진정한 것이었음 자체로 치환된다.

     

    아마도 워크숍을 확장한 연극으로서 지난 방식들을 관성적으로 또는 관성적이 될 수 있는 차원에서 연장해 왔을 때 결국 그것이 진정으로 길덕호에게 내재적인 의미가 되는 지점이 아마도 발생했으며, 그로부터 연극을 처음으로 만들게 되었을 때, 변증법적으로 주체가 발생하는 효과를 거기에 대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커뮤니티 아트가 지닌 드러나지 않는, 은폐된 증상 같은 것의 가시화이며, 그것의 필연적인 발생이 이 연극의 합목적성을 충족시킨다.

     

    그것은 뒤늦은 도착이지만, 필연적으로 (다큐멘터리 연극을 포함하는 더 큰 범주에서) 커뮤니티 아트가 선취했을, 매개자의 일방적으로 강제된 윤리의 명목이 아니라 매개자의 욕망과 윤리가 착종되어 있는 고이고 머문 어떤 지점이다. 그것은 곧 ‘괴어’ 있는 욕망, 마음, 정서 따위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착한 연극은 아니지만, 착한 연극의 틀을 지녀야 하는 커뮤니티 아트가 그것을 벗어나는 것, 불순하게 뒤섞이는 것, 또는 순일하게 완수할 수 없는 것 들을 경유해, 그러니까 그것들을 봉합한 채 완성된다는 사실을 또한 드러낸다.

     

    〈괸돌클럽〉은 그동안의 작업에 대한 복기이자 누락되고 지나쳤던 것들을 함께 회고하며, 사라지는 매개자의 자리를 복구하여, 그 자신의 해방과 자유를 향하게 된다. 그것은 그가 해왔던 지난 작업의 방식과는 다를 것이며, 따라서 그는 이 작업을 형식적으로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욕망을 규명하는 차원에서 내재적으로 정의하는 데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곧 그들의 연극에 대한 열망과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의무 사이의 간극이 해소되는 게 아니라, 비로소 그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보는 지점에서 ‘나’의 (재)의미화 과정 역시 비로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공연 일정: 2026. 09. 18 (금) – 09. 20 (일)
    공연 시간: 금 19:30 · 토/일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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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문화양조장 [스페이스 빔]
    인천 제물포구 서해대로513번길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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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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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연출     길덕호
    조연출     박지영
    드라마투르그   허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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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연      박두수 오선아 이진화
            박지영 길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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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액팅코치    박경주
    공간연출    유영봉
    조명      김성구
    음악      이진화
    안무      류장현
    인형제작    문재희
    의상·분장    이정희
    음향설계    김용석
    조명오퍼    황기석
    음향오퍼    김상우
    사투리 자문   지정남
    무대감독    배지혜
    코디네이터   김성환
    영상      김 AB
    기획·홍보    박지영 오선아 우희서
    포스터 디자인  우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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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도 친구들

    고영희 김도이 김영희 김정자 김정희 왕영분
    이정자 이효선 장호선 전성숙 한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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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최·주관    개방극장
    후원      인천광역시 · 인천문화재단
    협찬. 첫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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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공연은 인천광역시와 (재)인천문화재단의 2026년도 예술창작집중지원사업으로 지원받아 개최되는 사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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