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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반야 아재〉(작 안톤 체호프, 번안·연출 조광화): 외밀한 충동으로서 무대 - 무대-공간의 층위로 접근해 본 〈반야 아재〉REVIEW/Theater 2026. 11. 6. 14:46
역사라는 외부

국립극단, 〈반야 아재〉(작 안톤 체호프, 번안·연출 조광화)[사진 제공=국립극단](이하 상동). 〈반야 아재〉는 안톤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 1860~1904)의 『바냐 아저씨』(1899)를 1930년대 말 일제강점기의 충청북도 영동 한 면에 소재한 한옥과 정미소를 배경으로 옮긴다. ‘아저씨’ 역시 “아재”라는 한국적 표현으로, ‘바냐’ 역시 “반야”라는 불교식 한자 용어로 재적용되는데, 이 전반적인 번안으로부터 가장 두드러지는 지점은 시간보다는 장소성으로, 일제강점기를 상정하는 일본 순사 한 쌍이 야심한 시각에 한옥 정원을 가로질러 반복적으로 출현함은 그들이 불쾌하고도 불길한 존재의 침범으로서 진정 ‘외부’적인 것이 됨에도, 이는 일종의 엑스트라-맥거핀으로서 처리된다.
곧 이 일본이라는 상징성을 환유하는 존재들의 이질성은 집단 무의식적 차원에서 인물들의 살아가야 하는 삶의 유인으로 포함되지는 않아 보인다. 반면, 1930년대 말 경성을 필두로 유행하던 만요는 장 사이에서 하나씩 삽입되어 ‘시대’적 배경을 즉물적―자막에서 등장한 시기가 제목과 같이 표현된다.―으로 드러내는 정보적 표상인데, 이는 “하이킹”이나 잡지 “모단 여성” 등과 함께 ‘경성’을 시골로 도입하지만, 그 언어적 사용의 일어나는 장소성 자체를 반향하는 언어, 가령 방언으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으며, 이는 경성을 무의식적으로 (지)향하면서 시골을 임시적으로 전유하고 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경성은 경성에서 온 부부인 서병후―세레브랴코프―와 오영란(의 의상)―엘레나―에게서 오는 대신, 서병후를 사위로 둔 양말례―마리야―가 보는 ‘모단 여성’ 잡지의 언급에서부터, 서병후의 딸 서은희의 “반야산 하이킹”에서 온다. 곧 서병후의 문학가로서 얻지 못한 영예와 함께 교수직 역시 떠나 시골로 내려온, 변변치 않은 현재의 처지는, 통속소설 하나 제대로 못 쓴 비현실성과 무능함의 차원으로 반야 아재, 박이보―반야―에게 한탄의 대상으로 갈음될 뿐, 인물 자체로 입체성을 드러내거나 합목적적 유인을 얻지는 못한다. 그 부정성의 치환 작용 아래, 서병후의 문학적 재능 없음과 자조적 탄식이 윤리적 부정성과는 관련이 없음 역시 드러난다.
환상적 실재로서 정미소

그리고 어쩌면 극의 심각한 갈등을 불러오는, 그의 유산 활용에 대한 마지막 제안, 곧 애초에 장소성의 발단이 된, 그가 첫 제안한 정미소의 설립 및 그 미진한 운영을 거쳐, 이곳 운영을 정리하는 대신 인천에서 판을 넓혀 정미소를 다시 여는 것을 제안할 때, 원작은 당대 자본주의의 기치 아래 그것에 항거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무너져갔던 부르주아의 위상에서, 그것을 보완, 갱신하는 오히려 그 자본주의에 적합한 실질적 아이디어로서 자리하는 것은 아닐까. 반면, 이 고택을 125년 전에 판매한 자신의 아버지를 거슬러 이씨 왕조의 피가 섞여 있음을 계속 반복하는 이기진―텔레긴―은, 원작의 몰락한 지주에서, 양말례 집안의 식객인 것과 같이 어정쩡하게 위치한다.
곧 이기진을 경유해 조선 왕조의 무능함이 신분 질서에 매몰된 구시대적 발상의 차원으로 낙착되고, 신문물을 먼저 받아들여 제국주의 열강의 면모로서 조선을 침탈한 일본의 지배는, 대신 만요를 위시한 지나치게 경쾌하며 신문화의 용어들로써 점철된 만요 안의 들뜬 현세주의적 분위기가 상정하는 신문물이라는 대별된 심상의 지점으로 (옮겨지며) 은폐되는 것 아닐까.
그리고 정미소는 서병후-오영란 부부가 인천으로 떠나는 시점과 맞물려, 거의 마지막 시간에 이르러서야 ‘가설’되는데―곧 무대가 단순전치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장소성 자체로 특정되는 (어떤 단서도 실은 없는) 대신, 그 둘이 마주할 인천에서의 정미소에 대한 미래적 환영으로 자리하는 듯 보인다.
이때 그것이 드러내는 위용은 그들이 떠나고 난 이후 다시 그들을 위한 삶을 살아내어야 하는 ‘남은’ 인물들의 처지에서 허무함을 거의 무대 바깥쪽으로 밀려난 인물들을 통해 더 바투게 곧 물리적으로 압박하여 강조하는 가운데, 그들의 노고와 삶으로 지탱되는 인천 정미소에의 실질적 동력과 그에 부속되는 삶을 상징화한다―그 전까지 현상되지 않은 정미소를 거슬러서/빼고는 동경 유학 출신이자 경성에서의 삶을 영위해 온 서병후의 삶 역시 접속될 수 없었던 셈이다. 네모난 격자형 나무 패널은 정미소의 벽이자 공간의 구분 요소로서 그 안의 사람들을 차폐한다.
그리고 전면의 바퀴형 생산 라인을 거쳐 도착한 지나치게 큰, 비상 환기구처럼 보이는, 도정기의 깔때기 모양의 호퍼 부분이 무대 중앙 상수 쪽에 내려와 있는데, 그것을 자신이 정미소에서 일하다 다친 이후 자신을 지탱해주던 지팡이로 툭툭 건드림으로써 (곧 자신을 지탱하지 않음으로써) 박이보는 볍씨 한 가득을 맞고 쓰러진다.
그의 죽음충동의 유희적 변주로 인한 일단의 해프닝 사태는 결국 서은희의 위로로, 그리고 서은희를 향한 단말마 같은 말 “나 아파~!”가 선행하는데, 이는 한껏 위축된 ‘헐벗은’ 형국과 그의 생짜 떨리는 목소리로부터 직접 현상되어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횡단을 표지해 낸다. 이때 소냐의 위로는 모두에게, 그리고 세계 너머로 확장되는 직접적 위로인 동시에, 그들의 계속되는 서병후로의 부속적 삶의 차원을 수용해 낸다.
왜상의 인물들

그러니까 시골에의 수탈이 제국주의 일본이 아닌 도시 경제를 지탱한다는 식민 경제의 굴절된, 식민 경제를 우회하는 그 같은 결론의 도출은, 부르주아 대 프롤레타리아의 관계성을 경유하여 최종 낙착되는 과정으로, 거기서 생략되고 소거되는 건 제국주의 일본의 수탈이다. 그러니까 서은희의 위로는 현재의 우리로 건너가는 데 있어 하나의 문턱이 있다.
그것은 극에서는 분명 명확히 해명되지 않지만, 우리가 ‘이미’ 지나쳐온 역사로, 곧 어떤 미래의 기약은 일제강점기 말기를 에두르면서 동시에 강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인천으로 횡단했음의 환상 차원에서 봉쇄된다. 그것은 역시 환상 차원으로 횡단해 오던 그 ‘떠돌던’ 경성으로의 한 발짝 나아간 접근이다, 실재의 그림자로 ‘맴돌던’ 일본 순사를 피해 말이다.
서은희의 긴 위로가 끝날 즈음에 정미소는 다시 돌아가고 소음은 증폭되는데, 이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장치로부터의 승화 작용이 환상적으로 접붙는 과정이며, 산업화의 괴물적 생명력이 그 전까지의 숲을 대체한 이후, 마치 숲속에 낸 불과 같이 전이된 다른 세계의 미래로 인계해 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일종의 환상적 레이어로서‘만’ 존재하지만, 진짜 가정된, 실재의 현실을 곧 뒤바뀐 세계의 풍경을 정의한다. 곧 근대화의 핵심 동력인 산업화는 마치 일제강점기의 시기를 소거하고 매끈하게 두 시기를 잇는, 하나의 순환된 기계 장치의 ‘자발적’ 작동으로써 기입된다.
따라서 예기치 못 하게 또는 의도치 않게 〈반야 아재〉는 왜상의 차원을 암시하며―시련과 ‘위로’는 가족사적으로 그리고 국가 차원에서 따로 또 같이 이뤄지는 것이다.―, 실은 〈반야아재〉 자체가 각 인물에게서 왜상의 흔적을 암시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반야”는 실제 인물이 아님에 유의할 필요가 있는데, 다만 반야사의 절로 잠시 출가했을 때에 기초해 박이보가 그것으로 환유되는 것이다. 그곳은 서은희가 유행하는 풍조에 따라 가고자 하는―“하이킹”―, 그렇지만 가지는 못하는 점에서 맥거핀이 되는, 그럼에도 그럼으로써 이상향적 자취를 남기는 반야산에 있는 거로 명확하게 추정된다.
그러니까 반야사 출가의 시기를 얼룩으로 안고 있는 반야 아재는 반야사와 이곳 사이를 맴돌면서 세상 무상함의 진리를 깨닫는 ‘지혜’를 매개하면서 그것으로부터 분열되어 있는 존재이다. 이 매개의 지점으로부터 원작의 인물들이 갖는 허무함은 더 큰 지혜의 장소와의 시차를 둔 지점으로 재결정될 여지를 만드는데, 어쩌면 그것은 다른 인물들이 아닌 박이보에게서 사후적으로 완성된다. 이른바 서은희라는 보살의 말씀을 통해서 말이다. 그럼에도 〈반야 아재〉는 원작의 세부 플롯과 인물 들을 ‘재적용’하는 제1 원칙을 수행해야 하며, 대표적으로 인물들의 허무함은 오영란에게서 능동적이고 명확한 것으로 나타난다.
기이한 생명력의 대상으로서 한옥

〈반야 아재〉는 원작의 재적용의 차원에서 시대의 정취 그리고 불교적 진리의 새로운 이념으로의 승화까지로 나아가야 하는 과제를 안는데, 곧 그 새로움과 차이가 봉쇄되는 건 원작의 형식으로 소급되는 것에서 오는 것이라는 역설이 발생한다. 원작에 기꺼이 붙들려야만 하는 이 숙명은 의도치 않게 또는 무의식적으로 일제 강점기를 과거의 암시적이고 잠재적인 것으로, 그리고 열린 미래의 시점에서 일부의 차원으로 가라앉히는데, 그것은 거대한 산업 동력의 경제 근대화라는 이미지이다.
경성이 주는 동시대적이고 긍정적인 그 이미지와 감시하고 검문하는 그림자적 적의 이미지 사이의 간극은 거대한 구조물의 자체적 동력의 역량으로서 승화되며, 후자를 더 큰 것으로, 그리고 일제강점기 이후의 또 다른 시대와의 친연성 속에서 그것을 읽어내도록 한다―“그렇게 아파도, 우린 도망가지 않았구나. 살아갔구나.”라는 서은희의 박이보를 향한 위로의 대사는 미래에 대한 어떤 희망과 각오가 아니라 이미 그것들이 근과거가 되어버린 어느 순간, 그 과거에 대한 회고적 차원으로 읽힌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그 전까지 한옥과 그 마당, 누마루의 이미지는 추억의 대상이 되는데, 처음 가장 많은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였던 앞선 그 순간, 서병후 부부와 서은희, 이기진, 양말례까지 하나의 풍경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순간은 특히 그렇다. 그러니까 이들은 한데 모이지 않고, 그 교차되는 관계의 구조 속에서 일부의 관계만이 현상된다.
가령 은희는 서병후 진료 차 왕진을 오는 의사 안해일―아스트로프―을 사랑하지만, 서병후는 그것에 무심하며, 따라서 둘의 대화는 겉돌게 되는데, 이때 영란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 은희는 해일을 대화의 대상으로 불러올 수 있게 딘다. 따라서 은희-해일, 은희-영란, 영란-해일로 이어지는 분절된/끊어진 삼각형의 관계와 달리, 가족이라는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최초이자 마지막 이 순간은, 등장과 함께 사라지기는 하지만, 가족을 재건하는 하나의 이미지로서 낙착된다.
숲이라는 무의식적 상징

공간과의 유착 관계로 본다면, 한옥의 내부는 나이가 많은 서병후나 양말례가 차지하고, 나머지는 그 바깥에 있게 되는데, 이때 가장자리에 직접 있거나 가를 맴도는 이기진, 그보다 조금 확장된 범위에 박이보가 있다면, 해일은 그 자신에게 직접 할당된 공간이랄 게 없다. 해일 역시 직접적 왜상의 영향 아래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환자가 갑작스레 죽음을 맞게 된 상황 때문이다.
그는 시대의 변천에 따른 3개의 마을 도면을 통해 숲을 포함한 자연이 얼마나 급격하게 줄었는지를 오영란에게 설명할 때 잠시 거실을 제것처럼 점유할 뿐이며, 동시에 저 너머의 거대한 공간을 이미지화하며 그것으로 기꺼이 환원되고자 하는데, 이때 미래의 숲에 대한 열망은 그의 왜상을 가리는 강력한 환상이 된다.
그리고 실은 한옥 너머 배면의 이미지로서, 무대의 모호한 검은 가지들의 뒤엉킨 풍광이 실루엣으로 나타난 배경막 자체는, 사실 4B 연필로 되는 대로 스케치북에 낙서해 놓은 이미지에 더 가까운 그것은, 그나마 숲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 곧 안과 바깥의 경계에 위치한 누마루는 중간적 공간이자 돌아가는 무대에서의 끄트머리로서 횡으로는 넓은 전경을 종으로는 침투되는 또는 멀어지는 근접성의 감각을 주는데, 그것은 인공 연못으로 연결되면서 자연으로의 통로로서 기능하며 문화적으로 흡수된 자연을 함입한다―이 누마루-연못의 생명력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날 때는 오영란이 고고한 이미지를, 실제 구두를 벗고, 거기에 발을 담그며 급격하게 은희와 다시 관계를 회복하게 되는 장면에 있다.
검은 숲은 불길한 저 너머인데, 그것은 순사들이 현상되는 일종의 암흑적 진공, 마치 나갈 수 없는 2차원의 닫힌 막 자체이면서, 해일이 꿈꾸는 숲의 문명을 초과하는 생명력과 힘을 또한 상징한다. 곧 검은 숲은 무의식의 여러 층위를 잠재하는데, 죽음의 그림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해일에 의해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반동적으로 매개된다. 반대로 부정성의 차원에서 억압된 무의식의 차원 역시 근접하지만, 〈반야 아재〉에서 그것은 거의 은폐된다.
그러니까 해일이 꿈꾸는 숲의 평화적, 안온한 공간이 가진 영원한 미래는 일종의 죽음충동이 환상적으로 무대화된 것과 같다. 이 무의식을 다시 현실로 되돌리는 것이 정미소의 출현이라면, 그것을 다시 삶으로 붙잡는 것이 은희의 말인 셈이다.
〈반야 아재〉는 의식과 무의식, 문화와 자연, 현재와 미래, 삶과 죽음을 경계와 막, 유동하는 터전과 배경이라는 공간의 두 분별 아래, (마음의) 거처 없는 존재들과 공고한 권위와 세를 누리는 존재들을 분배하며, 나아가 극이 나아가는 어떤 저 너머의 세계, 충동 등을 상정해 낸다. 그것은 바냐가 아닌 반야라는 것이 외부의 실재라는 사실, 바깥의 장소라는 사실에서 암시된 부분일 수 있으며, 그것이 가리키는 불교의 깨달음이 인물의 내재적인 측면이 아니라, 결국 다다를 수 없는 물리적, 외부적 실재의 차원임을 따라서 그 역전된 곤궁의 상황을 함꼐 드러내고 있는 것 아닐까.
김민관 편집장
2026.05.22 ~ 2026.05.31 평일 19시 30분 / 토·일 15시 (월 공연 없음)
소요시간 170분(인터미션 포함)
만드는 사람들
작 안톤 체호프
번역 장한
번안·연출 조광화
드라마투르기 윤서현
무대 이태섭
조명 정태진
의상 김영진(차이킴)
분장 백지영
소품 노주연
음악 옴브레
음향 권지휘
조연출 김하늬
조연출보 한시안
컴퍼니매니저 박은서
출연
양말례 役 손숙
서병후 役 남명렬
오영란 役 임강희
서은희 役 심은경
박이보 役 조성하
안해일 役 김승대
이기진 役 기주봉
마점점 役 정경순
순사1 役 심완준
순사2 役 민재완
사환 외 役 김신효'REVIEW > Thea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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