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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극단, 〈역행기〉(김주희 극작, 신재훈 연출): 역사를 전승하여 현재를 재활성화하는 법
    REVIEW/Theater 2026. 11. 6. 14:47

    모험 서사로써 역사에 다가서기

     

    국립극단, 〈역행기〉(김주희 극작, 신재훈 연출)[사진 제공=국립극단](이하 상동).

    〈역행기〉는 8년간 방에서 고립되어 있던 인안나가 삶을 포기하려던 순간 지하 세계로 들어가며 이곳에서 과거의 고통받았던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 자신의 가족들을 만나고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는 일종의 모험 서사의 양식을 지닌다. 이때 60년에 걸친 근대 한국 빈민 (노동자) 계층 여성의 삶을 4대에 걸쳐 나열함으로써 가려져 있던 여성 역사를 발굴하고 조명하는 한편, 그들 간 이해와 연대의 차원을 모색한다.

     

    방에서 나오지 않고 집에 문장들을 새겨 넣던 인안나는 재개발 구역에 포함되어 압살되거나 사라질 위험에서 벗어나 그들을 듣는 이가 되며, 둡은 인안나와 동반되는 그에 대한 사관이거나 기록 매체 자체로, 그는 인안나를 새겨 넣다가 인안나를 따라서는 인안나가 듣는 말들을 새겨 넣게 된다. 그 기반이 되는 물질인 종이와 일으키는 노이즈가 이야기의 밀도가 증폭될 때 일종의 의성어로 전유된 “사락”으로 체현된다.

     

    둡은 곧 인안나가 구성하는 또 겪는 그 세계 전반에 대한 기록인데, 그 말들을 중간중간 채우고 옮긴다는 점에서 ‘지문’에 상응한다. 처음 등장한 인안나는 둡에 의해 기술되며, 이 관찰과 지켜봄의 차원에서 접근되는 인물의 양상은, 그리고 인안나가 마주하는 다른 세계에서 그가 청자가 되는 상황은 〈역행기〉의 타자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동시에 그것과 어떤 경계와 여지를 안고 나를 비추어 보는 태도를 전제한다.

     

    인안나가 지하 세계의 연못에서 돌덩이가 안고 있던 폭탄을 대신 떠안는 행위를 하자 폭탄의 시간이 원래로 돌아가고, 이후 폭탄을 대신 안고 절벽 아래로 떨어진 에레쉬를 향해 인안나 자신도 몸을 던지는 행위를 감행하자 세계는 기적처럼 폭탄을 한갓 사물로 되돌리고 다시 처음의 장소인 양 돌아온다.

     

    불가능성의 시도

     

    이 두 개의 대속 행위 중 첫 번째 행위에서는 오래전 전쟁의 상황에서 주고받던 폭탄들을 받아내며 그 시간에 고착되어 있던 돌덩이의 시간이 풀려나갈 수 있음을 의미하며, 이는 현재의 차원에서 횡단할 때 비로소 역사가 재정립되며 해원의 경로가 생겨날 수 있음을, 그리고 두 번째 행위에서는 죽음과 맞바꾸는 용기, 죽음을 통과하는/뛰어넘는 용기가 (곧 죽음충동이며) 비로소 삶을 재정형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음성으로만 유일하게 등장하는 아마도 남성의 목소리, 무저갱 자체인 키갈의 초월적 힘이 내파되며, 그로 인해 모든 기억이 수면 아래로 잠기는 키갈의 영역―따라서 키갈은 모든 기억의 보고, 총체이다.―이 순간 뒤집혀 마침내 시간의 리듬이 복구되는, 시간이 재생되는 순간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에레쉬가 경계를 지키는 자신의 임무를 거역하고 현실로 나아가서 인안나를 붙들고 떨어진 것과 같은 차원에서의 불가능성의 시도이며, 그 둘 다 블랙아웃으로 처리된다. 그러니까 키갈의 장소는 실제적이기보다 실재적인 것 아닐까.

     

    에레쉬는 한쪽 날개로 인안나를 바닥으로 끌고 오며, 그 이유를 아는 것이 극의 과제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며, 또한 1부의 처음에 잠깐 서술되면서 2부의 열쇠가 되며, 그의 욕망 자체가 중요하게 부상한다. 이는 후반 무대 뒤쪽에서 크고 흰 날개를 달고 빛을 받는 모습으로 부상하며, 그 개인의 자유를 예외적으로/독립적으로 현상하는 에레쉬를 김시영은 고착되거나 억압되지 않은 모습으로 생기 있게 표현한다, 대조적으로 박수진은 짓눌려 있는 인안나를 담담한 톤으로 일정하게 기입해 간다면.

     

    사실상 인물들의 고착됨을 표현하는 건 형식주의적 기술로서 연장된다. X-Y-Z 축으로 구성된 무정형의 공간을 설정하고, 그 안의 모서리들의 점을 찍는다고 하고, 동작을 수학적으로 기입하고 반영하는 가상의 무보를 경유하는 라반 테크닉을 활용해 인물들에게 발현되는 건 어떤 정형행동이다―그것은 허공의 시선을 경유해 징후적이거나 무의식적 차원에 대한 어떤 혐의를 만든다. 고립되어 있으며, 땅에 발이 붙은 모습에서 왼쪽 어깨를 바깥쪽-위쪽으로 회전시켜 돌아오는 인안나의 동작이 그 첫 번째 순간이다.

     

    구조적 변경의 움직임, 미시 세부의 반복적 움직임

     

    인안나의 세계가 바뀌는 것이 인안나가 고정된 값으로 놓이는 가운데 벌어지는 건 〈역행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인데, 곧 처음 아래로 기울어진 무대가 네모난 돌-평상의 중앙부를 남기고, 나머지 바닥이 위로 들려 지하세계를 표현했다 다시 본래 자리로 복구하는 것이 그렇다. 이 첫 번째 공간에의 이격에서 박수진은 정면을 향한 채 굳건한 고정점―사물화―이 되어 수직 낙하의 긴 체류 시간을 순간으로 감축시킨다.

     

    동시에 그로써 거대한 세계의 변경에 대한 공포를 두려움으로 전화시키는 걸 막는다. 그 어깨의 달싹임이 고정점으로서 인안나라는 존재 자체와 조응되는 것이었다면, (그리하여 발화에 수반된 움직임이 수직축의 연장선상에서 예외적으로/유일하게 정합되는 것이었다면,) 장면별로 달라지는 응결된 움직임은 말의 물리적 차원에서 연장되는 동작이 아니며 (또는 그 자체로 주체의 의지로 해석될 수 있는 동작이 아니며) 디테일하게 말을 재현하며 그 말에 상징적 차원을 부가하는 동작과도 엄밀히 다르다.

     

    첫째, 이러한 동작들은 (말로부터 발현된) 감정이 직접 연결되지 않으며, 오히려 감정을 차단한 채 벌어지고 있다. 둘째, 같은 동작의 반복이 말로부터 전화된 그리고 말과 동조되는 순간으로부터 거리를 벌리고 있다. 그러니까 어느 순간 필연적으로 배우들의 몸짓은 형식주의적 미학으로 귀결되는데, 그것은 발화 기관의 안정화를 위한 수직적 축과 한 방향의 시선을 향한 수평적 축을 두 축으로 잇는 가운데 부가적으로 배가되는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는-보는 몸과 몸의 동기가 건너가는 연장된 몸이 서로로부터 제한, 제어당하는 광경이다. 움직임의 범주에 따른 여러 상징성이 구현되는 것이라고 할 때, 이는 붙잡힌 시선과 얼굴이 담은 공허함과 비어 있음의 정동 자체를 변양시키는 데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실은 의미의 영역을 문자적으로 파악하는 것에 가깝다―문자적 차원을 확장시키는 매체로서 움직임이 유효할 것이라는 매체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와는 달리. 곧 하나의 배가되고 있는 기호가 아니라, 이중의 기호가 각기 합성되고 있으며, 그 중심은 일종의 멍한 눈이다.

     

    고착되는, 혹은 고통스러운

     

    이는 결과적으로 라반 테크닉이 매우 제한적으로 쓰여야 함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그 테크닉이 매우 제한적으로 쓰일 수밖에 없음만을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움직임의 가능성이 인물의 동기를 재산출하기는커녕 사실상 굳어 있는, 제자리와 허공에 고착된 인물에 부가되는 것이 될 때 그것은 움직임이 그렇게 만드는 것인지, 움직임을 거꾸로 그렇게 만드는지 혼동케 한다.

     

    정면성과 일정한 발화 방향의 산출을 위해 그렇게 된다는 것은 움직임(의 원리)에는 은폐되어 있고, 시각적으로는 절대적인 이미지를 현상한다. 이 독립된 존재들의 응어리진 시간 자체를 제한된-반복된 움직임의 계열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본다면, 실은 그것은 적합하고도 적확한 것이다. 인물들은 각자의 시간에 고여 있으며, 각각의 모나드로 자리하며, 따라서 소통 불가능한 독립된 위상 안에 있다. 대화는 시차로 비켜 나간다. 우리는 독백도 방백도 아닌 기이한 혼잣말을 듣는다.

     

    그리고 그것이 주는 고통이 있다. 이는 인물의 내재적 고통이지만, 공연을 본다는 것의 순전한 고통 자체이기도 하다. 〈역행기〉를 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가령 하나의 움직임 단위가 A에서 B로 건너가는 일이라고 할 때, A~B는 사실 A~B~A…의 끝없는 순환이다. 따라서 움직임의 새로운 가능성이 착지 장소로부터 확장되는 게 아니라, 결코 확장될 수 있는 게 아니라, 다시 돌아오기 위해 고정된 값을 예약하고 있으며, 그것을 기억해야 한다.

     

    말은 흘러가지만, 움직임은 그럴 수 없다. 사실 말은 그 인물에 붙들려 있기에 세계의 시간은 (일정하게) 흐르지 않는다. 어쩌면 이는 이 지하 세계의 비일상적, 탈일상적 차원의 시간성 자체를 체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움직임은 여러모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의미심장하다, 또는 그 의미에 가닿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아마 가장 자율적인, 움직임으로의 확장이자 제약된 움직임에의 복속의 차원에서 벗어나는, 가장 일상적 차원에서의 움직임을 구가하는 건 인안나 곁의 둡이다.

     

    지문의 인격적 현전

     

    둡은 인안나의 말이 기입되는 벽―“살아야 할 이유”를 “한 장 한 장” “벽”에 적은 “기도”―, 서판인데, 사실상 그의 말을 반향하는 존재로 (처음부터) 정초됨으로써 사물의 단순한 지위를 벗어난다. 둡은 인안나의 매체적 연장만이 아니라, 인안나에의 한 부분이며, 인안나(의 의식적 차원)에 복속되지 않는 또는 인안나에게만 능동적으로 복속되는 인안나를 구성하는 외부적 지위의 사물이면서 인안나를 능동적으로 기록하고 펼쳐 보이는 매개적 위상을 갖는다.

     

    그것은 고정된 서판이 아니라, 일종의 인안나만을 밀착해서 기록하는 사가와도 같다―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락”은 종이를 넘기는 소리에 가깝다. 사실상 둡은 희곡의 지문을 역할로 연장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것은 인안나에게는 직접적 영향을 끼치지 않는, 그리고 현실과 독립적으로 자리하는 화자의 차원을 전제한다. 그것은 비가시적이어도 된다. 비가시적일 수 있다. 또한 세계의 대기를 함께 흡입하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그의 움직임은 자율적이다. 다만 그것은 인안나에게 정향된다. 하지만 그는 자유롭다. 후반부에 그는 어쩌면 인안나의 공황적 상태에 맞서, 인안나에게 독립적인 운동을 보이며, 인안나가 지하 세계를 여행할 때의 험난함을 응축해서 표현한다. 이는 어쩌면 둡은 인안나를 보호하는 정령적 존재인 게니우스와 같은 것임을, 그와 떨어져서/떨어짐으로써 예외적으로 구현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사실 인안나가 인안나를 포함한 다른 인물들의 전사까지 술술 이야기할 때 역시도 그는 인안나를 초과하며, 그가 지문을 대리하는 인격적 현전으로 자리하면서 실은 다른 이들과 대화를 하지 않는 비자연적 신체, 그와 동시에 관객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연적 신체라는 것은, 희곡과 연극 사이의 간극을 처리하고 봉합하기 위해, 일종의 방백이라는 또 다른 연극(에)의 봉합 기술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숭고한 여성-자연의 모티브

     

    그러니까 방대한 시공간과 옮기기 힘든 행위를 다 대리하며 처리해 주는 둡의 기술은, 불가피한 어려움을 쉬이 묘사 ‘안’의 세부로, 기입되고 있음에 대한 주의로 손쉽게 전치함으로써 이뤄지는 것이며, 동시에 불가피한 것이다. 그것은 연극의 한계를 처리하고 봉합하는 기술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과제는 추가된 동작들만이 거의 남게 된다. 결과적으로, 둡의 묘사 혹은 서술이 정교한 스펙터클의 이미지를 소환할 (수 있을) 때, 기실 연극으로 옮겨지며 사라져야 할 지문은 문학적 성취로 연장되는 셈이다.

     

    〈역행기〉에서 전근대적-역사적, 보편사적-미시적 차원을 하나로 관통하는 건 오직 페미니즘적 서사이다. 그런데 할머니 주머니-어머니 에레쉬-언니 핑크-동생 인안나로 이어진 여성의 숙명으로 분류되는 이 역사는, 당대의 질곡의 삶에서 자유와 해방을 꿈꾸던 하위 계층을 각기 대표―그러니까 이는 각 캐릭터의 고유성을 생성하는 것보다는 전형성으로 환원된다.―하는 것에 가까우며, 여성의 특수한, 구체적 삶의 당위를 설명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키갈은 썩고 오염된 것을 삼키고 깨끗한 샘물을 흘려보낸다. 그런 지점에서 키갈은 근본적으로 성스럽고 숭고한 것이면서 대화나 언어가 통하지 않는 괴물적 타자성의 존재이다. 그의 역할은 (긍정적으로) 의사-여성적인 것에 가깝지만, 이는 여성 억압적인 관념이 투사된, 억압된 여성들의 이미지를 압출해 낸 정수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부정성을 전유한 것이다).

     

    여기서 상기할 수 있는 〈은의 혀〉는 마찬가지로 보편적 역사의 차원에서 (하위 계층의) 여성 서사를 건져 올리는데, 이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로서 기입되어 현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로 연장되며 새로운 역사로의 가능성을 꿈꾸게 된다. 반면, 〈역행기〉에서는 역사는 모두 과거로 물화되어 있고, 개인의 사건들로 고립되어 있으며, 이로써 한 명이라도, 곧 인안나가 현실로 되돌아와 반드시 새로운 삶을 기약하며 그들을 대표해야 할 이유가 생겨나게 된다.

     

    매개를 위한

     

    인안나-둡은 필연적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그 틈에서 발화해야 하는 매개자인 동시에 발화자로 변모해 가는 과정을 거치게 되지만, 이는 현동화가 현실적 차원이 아닌 서사적 차원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니까 〈역행기〉는 인안나의 성장 서사이기도 하지만, 인안나의 성장 서사를 경유해 역사적 타자의 형상을 추출, 재현해 내기 위한 전승의 구조를 갖고 있으며, 문제는 그 이야기들이 대부분 단편적이고 도식적이라는 것이다.

     

    인안나는 본의 아니게 타동적 영매가 되는데, 인안나가 이곳에 진입해야 할 이유는, 바닥으로 추락해야 하는 이유는, 그의 삶을 상징적-신화적 차원에서 재결정 짓기 위한 측면도 있지만, 현실적인 동시에 윤리적인 이유는 인안나에게 원한 감정을 가진 핑크의 해원을 그가 이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명분이고, 실은 현동화될 수 없는 과거를 듣기의 윤리로써 실천하기 위함이다―곧 이 윤리적 자세를 자연적 태도로 갈음하기 위한 지점에서 이 명분은 하나의 기능적 요소가 된다.

     

    이것을 증명하듯 핑크의 인안나에 대한 악감정은 인안나의 내재적 곤궁이 되지 못하며, 인안나라는. 인물의 타자에 대한 개방성, 수용성으로 확장, 환원될 뿐이다. 곧 인안나는 듣기의 윤리가 가설되는 하나의 텅 빈 기표이자 배경이며, 그것은 둡이 인안나에게 그러하듯 그러하다. 이 타자에 대한 듣기적 수용의 자세는 작가의 작품에서 추구하는 윤리적 태도가 연장된 것이며, 이것이 인안나가 사실 무정형의 인격, 침착하기보다 무심한 인격, 무엇보다 자기주장을 갖지 않음에 대한 이유이다.

     

    이는 좀 투박하고도 직접적이다. 왜 인물들은 각자의 개성으로 생동하지 못할까. 과거에의 고착은 과거의 고착으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그사이의 변전을 이뤄내지 못한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역행기〉의 역능은 신화적 차원으로, 현실을 다시 썼다는 것이며, 이는 상호 다른 역사의 차원을 여성 계보(의 명목) 아래 줄줄이 엮어내어, 가상의 역사적 진공을 가설할 수 있게 하며, 또한 응결된, 응어리진 타자의 형상들, 역사의 자국들을 선명한. 재현의 방식으로써 경유할 수 있는 진공을 만든다.

     

    매개를 통해 주체로 나아가기

     

    어쩌면 그것은 근원적인 신화의 차원에서 읽힐 만한 것이며, 그렇게 정리될 법한 것이다. 인안나는 왜 8년 동안이나 자신의 방에서 나오지 못했을까. 그것은 자신의 기입할 수 없는 잔여를 기입하기 위한 과정이었지만, 곤궁에 처한 핑크를 알아봐 주지 못한 죄를 받기 위한 과정으로 다시 쓰인다. 그러니까 둡이 사물적 타자성을 인격적 현전으로 바뀌듯 뜻밖의 관점이 나의 삶을 새롭게 구성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인안나의 순진함과 인안나의 자각은 전혀 다른 인안나의 측면이며, 후자는 전자를 바탕으로 하지만, 타자를 경유해서만 그렇게 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핑크는 중요하며, 핑크를 전후로 다른 존재들도 타자성의 견지에 입각해 부상한다. 〈역행기〉는 절대적 타자성의 형상으로서 무너져 내리는 집과 등치되는 텅 빈 것 같은 신체성의 인안나를 전제한 후, 다시 그가 (더 많은) 타자성을 함입함으로써 현실로 승화되는 구조를 가진다.

     

    인안나의 현실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지만, 아니 재개발 직전의 처음으로 소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인지적 변화, 일종의 여러 맛의 해골물을 맛보고 온 뒤의 변화를 동반한, 변증법적 주체의 상승이 자리한다. 이제 인안나가 “딛고 있는 땅 아래에” 타자들은 자리하는데, 비로소 인안나의, 인안나라는 인지적-매개적 통로를 거친 뒤에야 타자적 존재들은 역사로서 목소리를 얻게 된 것이다―그것은 언제나 아마도 그러했지만, 그 전에는 의미화될 수 없었던 것이다.

     

    신화적 저 너머의 공간은, 타자가 아닌, 타자의 현전이 온전하게 담지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이 타자로서 말을 하게 될 때 그것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명증하다. 또한 그들이 인안나-우리에게는 타자의 형상으로만 발화한다는 것 또한 명증하다. 저 너머를 처음 현전시키는 건 에레쉬가 아닌 주머니이다. 에레쉬가 저 너머로 인안나를 이끌고 동반으로 떨어진 순간은, 그 의도를 포함해 장면 전체가 극 자체의 기억 상실증에 속하거나 비밀에 휩싸여 있다.

     

    기괴한 타자, 에 대한 타자화

     

    주머니의 등장과 주머니라는 캐릭터는 신효진 작 〈모든〉[각주:1]을 떠올리게 하는데, 마찬가지로 주머니는 저 너머를 깨닫고 저 너머의 중핵을 향해 가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처음 주머니를 만나 마신 물은 기억을 잃게 하는데, 망각의 여신, 레테의 강을 마시면 전생과 이승의 기억을 잃는 신화적 모티브는 사실 “썩은 것”과 “오염된” 것을 삼키고 “깨끗한 물”을 쏟아내는 키갈의 행위 자체로 소급된다―기억이 망각되는 지하 세계의 은유는 근래의 작업에서 〈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와도 연결된다[각주:2].

     

    이곳이 기억을 잃는 곳, 지워지는 곳이라는 점과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파묻혀 있는 곳이라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키갈의 행위는 영속적인 것이고, 이는 에레쉬가 언급한 것처럼 영원한 토대로서 “땅”, 존재보다 앞서 그리고 존재보다 뒤늦게 자리하면서 생물의 생장을 돕고, 그 안에서 살았든 죽었든 모든 존재를 품고 있음으로서 땅의 알레고리를, 압축적인 차원으로 변환한 것과 같다.

     

    그런 키갈이 남성의 목소리로 변조된 것은 극 자체가 여성과 동화되는 차원에서, 그러니까 극이라는 것 자체가 여성 신체적 차원으로 갈음되는 지점에서, 또한 초재적인 크기로서 상기되는바, 그 상대항으로서 ‘극단적인’ 차이가 필요했었기 때문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여성과 남성, 목소리와 소리의 대비가 극단적인 차원에서 조합된 결과 아닐까.

     

    그리고 거기에는 소리에 대한 타자성, 목소리에 대한 진정성의 관념이 결부되어 있는 것 아닐까. 곧 여성과 다른 신체가 매체적 차원에서 이화되고 분별되고 대비되는 과정에서 남성으로 주어지게 된 것은 결코 자연스럽지 않다. 목소리와 다른 소리가 다른 존재로 식별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 차이가 남성으로 (환원)된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이중의 타자화가 거기에 있다. 이 안에서 키갈의 소리는 사실 물리적 차원에서 비신체적인, (인간) 신체의 동시적 음원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바, 타자이며, 따라서 다른 매체 자체가 극과 친연하지 않은, 소거된 남성의 자리를 자연스럽게 대신하게 된 결과 아닐까. 그것은 또한 무의식적인 잔여, 무의식적으로 밀쳐진 남성적 잔여가 징후적으로 부상한 결과 아닐까.

     

    그런데 키갈은 요구의 존재, 욕동의 존재이기도 하다. 아니 오히려 그것으로써만 실제로 가시화된다. “와~줘”는 하나의 단어가 아니라 두 단어를 붙여 놓은 것 같고, 이는 “줘”만을 발화할 때, 완전히 다른 의미를 부각시킨다. 키갈은 존재를 호명하고, 무엇보다 그 존재에게 요구하는 존재이다. 그러니까 와서 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맹목적인 요청은 순전한 욕동 자체를 상정한다. 그것은 유아기적 욕동이고, 주체의 요구가 아니다.

     

    여성 관념에 대한 여성적 비판

     

    키갈은 오직 두 글자, 두 개의 문장이 절합된 하나의 단어처럼 보이는 두 글자만을 발화하지만, 앞서 본 것처럼 그런 키갈을 해석할 수 있는, 해석의 지점으로 이끌 수 있는 건 에레쉬뿐인 것으로 보인다. 에레쉬는 “엄마도 딸도” 아닌 “그 누구”(로도 정의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와도 엮이고 싶지 않아 한다. 여기서 페미니즘의 이념은 불교의 해탈로 굴절되어 승화된다. 더는 인연을 만들지 않고 홀로 자유롭게 날고자 하는 것이다.

     

    〈역행기〉에서 이것은 무조건적으로 긍정되는 것도 아니지만, 무책임이나 도피의 차원으로 기입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어머니-딸의 반복된 역사에서 여성적 대화와 연대라는 하나의 축이 가설되고, 어머니도 딸도 아닌 고유한 존재로 가치 정립되기 위해 분투하는 또 하나의 축이 들어서지만, 이 둘은 충돌하지 않고 공존한다. 아니 비켜 나간다. 현실에서 분투하며 고초를 겪던 핑크와 현실과 멀어져 있어 배려와 돌봄이 요청―“귀신이 되어 가는 사람 끌어안고 사는”(핑크)―되었던 인안나 사이에서 전자에 의한 일방적인 문제 제기와 갈등이 발생하는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곧 〈역행기〉가 이야기하는 건 여성만이 여성을 구한다 따위가 아니라, 여성에게 지워진 관념, 짐에 대한 비판과 부정 따위, 그리고 그 안에 앞선 관념 역시 수렴되어야 한다는 것 아닐까. 그래서 키갈이라는 타자성의 존재는 일견 환경 오염을 묵묵히 수용하는 땅, 지구, 자연과 같은 대상의 인격화로 보이며, 숭고한 여성성을 고안하되 그것을 여성이 아닌, 더 큰 타자에게 양도하는 것으로써 (연극에서 더 급진적으로는 여성이 아닌 존재로 정의함으로써) 여성의 발화와 다른 존재로의 비약을 허락한다.

     

    인식론적 변화

     

    이는 물론 신화적 모티브 안에서 현실의 거울상을 임시로 비춤으로써, 일종의 꿈과 같은 여행과 모험의 서사로써 가능해진다. 그와 동시에 환경과 지구에 대한 순전한 타자성을 검출하는 것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러니까 이는 진정한 해소는 아니다. 하지만 지혜와 메시지는 마지막으로, 처음에 올라갔던 거대한 땅이 내려옴으로써 내가 올라가는 것과는 반대로, 반복해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계는 주어진다.

     

    결국 키갈이 있는 깊은 지하 세계로 잠겨 갔다 다시 올라오는 핍진성 있는 가상-실재의 경험은, 이 잉여의 지각 운동 자체로써 어쩌면 깔끔하고 온전한 시간으로서 변환된다. 그 가운데 경험은 상기되고 또한 망각된다. 이 지연의 스펙터클은 또한 재개발 지역으로 무너져 내릴 집안에 있음의 트라우마를 변이, 증폭, 매개하여 보여주는 것으로, 반복되어, 수미쌍관의 구조를 완성한다. 그것은 에레쉬의 비상을, 그리고 다시 언제나 실은 제자리였던 인안나의 삶을 환기시킬 수도 있다.

     

    〈역행기〉는 이 바깥의 경계 구조물의 위치 변경을 기준으로 극을 명확하게 나눌 수 있다. 그 수직 천장에 투사되는 이미지들로써 변경된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던바, 그리고 그것들이 바닥으로 사라지며 마치 밝은 현실의 세계로 돌아온 것인바, 그리하여 궁극에는 세계의 거대한 변화가 ‘나’의 작은 신체로 수렴하는바, 〈역행기〉는 극 구조와 맞물려 존재론적이기보다 인식론적이며, 예외적으로 이 거대 구조물만이 과거의 무게가 주는 중압감을 실제적인 차원에서 수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여행은 역행을 통해 순행하는 것이며 과거로 소급되어 새로운 현재로 나아가는, 또는 임사 체험을 통해 인식적 고양에 다다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인안나가 중심을 차지하는 중간의 작은 정사각형 바닥은, 그의 작은 방이기도 하고 곧 세계의 전부로 연장되기도 하는바, 무섭고 기괴하며 현란한 다른 세계를 지켜보는 최소한의 경계이기도 하지만, 8년이나 닫힌 채 자신의 모든 발화의 언어를 삼켜 대신 기입하는 언어의 의미적-역사적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쩌면 오직 이 두 영역의 극단적인-연장적인 차이를 나머지 다른 인물들에게 분배해서 각자의 위치에서 어떤 세계를 ‘강조해서’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 라반 테크닉 아니었을까.

     

    김민관 편집장

     

    2026.09.03 ~ 2026.09.13

    평일 19시| 토·일 15시 (화 공연없음)
    ※ 접근성 회차: 9.11.(금)-9.12.(토)
    음성해설, 한글자막해설, 이동지원 서비스, 무대 모형 터치투어

    명동예술극장

     

    만드는 사람들

    작 김주희
    연출 신재훈
    무대 박동우
    조명 김효민
    의상 유미양
    분장 장경숙
    소품 남혜연
    영상 김희경
    음악·음향 이승호
    라반 움직임 이호영
    조연출 정세윤
    제작진행 김서현

    출연
    에레쉬役 김시영
    인안나役 박수진
    주머니役 박옥출
    핑크役 박은호
    돌덩이役 안연제
    둡 役 윤진성

    1. 2. “사실상 랑이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건 그가 인류의 새로운 문을 열 수 있는 숙명적 존재로 예기되어 있다는 점에 의거하는데, 거기에는 그것을 일러주고 그를 그 문의 경로로 인도하는 매개자 ‘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김민관, 「신효진 작, 김 정 연출, 〈모든〉: 동시대의 생태적 동경에 대하여」, 『아트신』, https://www.artscene.co.kr/2177. [본문으로]
    2. 3. “이곳 세계에서는 각자의 나무가 자라고, 그 나무에서 딴 열매를 먹으면, 당사자의 기억이 나무의 일부로 함입되어 자라나는 이상한 환유의 연쇄 과정이 벌어진다. 나무는 기억의 순수 매개체인데, 나무 자체의 기억이 자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자양분이 된다. … 내가 나무의 열매를 함입할 때 나무로 나의 기억이 나무를 자라게 함으로써, 나는 나의 기억을 이전한다. 하지만 나무는 보전하는 대신 물리적 크기로서 연장할 뿐이다―기억은 일종의 자양분으로 기능한다.”, 김민관, 「크리에이티브 윤슬, 〈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이로아 원작, 장윤하 각색/연출): 기억의 지지체로서 공동체」, 『아트신』, https://www.artscene.co.kr/230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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