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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안전연극제 : 면역력] 송정현, 〈정현 씨는 문화예술도 모르면서 왜 ‘포항장애인문화예술활동센터’를 만들었는가?〉: 예술의 형식으로서 정치적 발화가 갖는 어떤 효과들REVIEW/Performance 2026. 5. 7. 16:43

송정현, 〈정현 씨는 문화예술도 모르면서 왜 ‘포항장애인문화예술활동센터’를 만들었는가?〉 포스터.[제공=2026 안전연극제 : 면역력 제공] 송정현의 〈정현 씨는 문화예술도 모르면서 왜? ‘포항장애인문화예술활동센터’를 만들었는가?〉(이하 〈정현 씨는〉)는 그 제목 이후, 포항장애인문화예술활동센터를 그럼에도 왜 차렸냐라는 질문에 대해 그가 주는 답을 좇아가는 과정 자체다. 송정현은 센터의 설립 미션과 비전을 주창하는, 이른바 단상에 오른 연사인데, 이는 장애인보다는 시민의 자격으로서 그러하다. 사실상 그 말은 센터 자체의 구체적인 사실들, 곧 센터의 연혁, 프로그램, 규모, 활동 사항, 운영 원리 등 센터가 갖는 실질적 차원의 제반 요소들을 대체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그 센터가 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앞서 주체를 향하는 이 질문은, 이러한 꿈의 추상적이고 거대한 윤곽이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공허한지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예술과 어떻게 그의 심리적, 무의식적 상관관계를 맺고 있으며, 나아가 그가 꿈꾸는 그 자리에 예술이라는 중핵이 어떻게 자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곧 질문은 송정현의 내재적 차원을 향하며, 그에게 왜 문화예술도 모르면서 이 일을 하느냐라고 진정 묻기보다는 예술에 대한 무지가 예술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포함하는 부분, 곧 전자가 후자와 등치될 수 있느냐를 묻는데, 이는 그가 예술을 정의하기보다 바라보는 태도의 차원에서 (재)결정된다. 그리고 이는 외부적 질문에 도달하는데, 그것은 우리는 예술을 무엇으로서 보느냐라는 것이다. 곧 어디까지 예술을 가치의 대상으로 둘 수 있느냐라는 것이다. 독립영화에 배우로 출연하게 되면서 예술에 ‘입문’한, 예술과 관계를 맺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그는 실제 예술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적어도 제도의 견지에서 세 개의 활동 근거가 필요하다면, 작품에서 언급된 배우로서 데뷔, 그리고 실은 하나의 퍼포먼스였던 “(가)포항어울림장애인인권문화예술활동지원센터 창립총회”에서의 발언, 마지막으로 이번 공연을 포함해 달성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예술에 대한 보편적 욕망을 (스스로를 그렇게 기입하는 것으로부터) 전제하고 예술을 통한 사회의 보편성 성취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다. 전자가 예술 자체의 보편적 역량을 담보하면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에 대한 차별적, 차등적 구분을 내파하는 가능성으로 자리한다면, 후자는 장애예술가와 비장애예술가의 협력과 교류 안에서 예술 자체의 차등적 위상을 철폐하는 가능성으로 자리한다. 곧 전자가 예술을 경유해 보편적 시민의 예술에 대한 접근 가능성을 확인한다면, 후자는 거꾸로 보편적 시민의 자리로부터 예술의 구별 짓기에 대한 다른 경로를 예기한다. 이는 공공, 예술, 시민 모두에게 도달하는 공공성을 가진 발화의 특징을 구성하는데, 공공은 정책적 차원을, 시민은 예술에 대한 열린 권한의 요구를, 예술은 구별 짓기의 자세와 모더니즘적 고립된 예술가상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요청한다.
물론 거기에는 어떤 실행 방안이나 접근 방식이나 그에 수반된 계획 따위는 없다. 곧 순수 욕망의 차원, 꿈꾸기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송정현의 발화는, 일방향적이라기보다는 왜 그에게 문화예술이 그러한 의미로 응결되는가를 대답하는 차원에서 이뤄지는, 일종의 변증법적 대화술의 과정 아래에서 작동하고 있다. 사실상 예술이 어떤 효용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실천으로써 현실에서 더 많이 접근 가능해질 수 있는지는 설명되기 어렵(고 또한 여기서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어떻게 예술 자체에 대해 광분하듯 그것의 절대적 가치를 (마치 누구나 수용 가능한 차원으로) 전제하고, 열정적으로 모두가 그 터전 아래에서 교류할 수 있음의 이미지를 그리는 건 논리적이거나 합목적적이기보다 정치적이며 그 정치의 격정적인 선전 구호처럼 비친다.
오히려 〈정현 씨는〉은 이 발화를 하나의 프레임 안에 두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송정현이 보여주는 발화 자체를 연장하거나 매듭 짓는 대신에, 그가 예술에 대해 보이는 태도에서 드러나는 열정, 어떤 정동의 차원 자체를 조명하고자 한다. 곧 그의 말에 어떤 특별한 차원이 있다라는 것보다 그 말을 하는 존재 자체가 어떻게 특이성을 산출하고 있는지를 따라가는 지점에서 달라붙는 게 그 정동이다―그의 예술에 대한 말 자체 이상으로 그가 예술에 달라붙는 태도가 그에 달라붙는 관객의 태도로 전이된다. 송정현은 배 쪽에 밴드로 몸을 고정시킨 채 휠체어에서 연신 들썩이며 커다란 목소리와 장광설로써 관객의 시선을 끄는데, 그 에너지만큼이나 많은 땀을 흘린다.
〈정현 씨는〉은 셈해지지 않는 예술에 대한 의견을 가시화하며 바로 어떤 예술의 결과가 아니라, 그 예술에 대한 여러 사고를 발화하고 듣는 어떤 단상이 삶과 괴리된 예술의 특수한 체제를 영점으로 돌려세우는 효과를 가져오는 가운데, ‘문화예술도 모르면서’ 무언가에 대해 발화할 수 없다라고 단정짓고 있는 건 아니었는지라고 거꾸로 묻는다. 그러니까 문화예술도 모른다는 편견과 폭력적인 언어를 의도적으로 수여할 때, 반대로 송정현의 말을 마치 그 자체로 가져올 때 발생하는 건 우리가 문화예술에 대한 권리를 한정적으로 정의하고 있었으며, 그것에 대한 발언의 권리를 협소하게 규정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정현 씨는〉은 예술제도 자체에 대한 발화이지만, 그 예술제도 자체를 결정하는 심급 자체를 함께 가시화한다. 연출가인 이성직은 프로듀서로 역할을 맡고, 실질적으로 공연에서 연출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되는데, 그것은 존재 자체가 갖는 어떤 역량과 특이함을 편집하지 않겠다라는, 편집할 수 없다라는 느낌을 준다. 프로듀서 이성직이 하는 일은 일종의 돌봄(care)인데, 정현 씨에게 물을 가져다주고, 그의 땀을 닦아주고 하는 소소하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들이다. 또한 정현 씨의 발언 이후 휠체어를 옮겨주고, 또 발언 전에 휠체어를 제자리에 고정시켜준다.
그리고 발언 이후 〈영상: ‘정현 씨는 왜’〉에서 포항에서 서울까지 어떻게 이동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 정현 씨의 코털을 깎아주는 모습, 또 아파트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현관 보행통로로 내려와 교통약자 이동지원센터 차량에 탑승하기까지의 과정에서 하나하나 함께 하는 순간들을 보여주는 가운데, 정현 씨의 운신과 삶 자체가 조명되고, 사실 그러한 일상의 지점이 모두 특별한 것임을 드러낸다.
어떤 지점에서 융해되는 것, 곧 삶의 차이가 뒤섞이는 어떤 지점이 공연을 초과할 때, 공연을 정의하기보다 공연의 제반 조건을 검토하고 그 확장적 조건 자체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될 때, 연출은 곧 프로듀서화된다. 하지만 공연에서 연출의 자리가 작동하지 않는 건 아니다. 오히려 〈정현 씨〉는 그 연출에 대한 다른 자리, 재정의를 요청하고 또 가시화한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 관객과의 대화가 있었는데, 이때 정현 씨의 배우로서의 탁월함이 많이 회자되었고 실제 캐스팅 제안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그의 문화예술에 대한 사고가 어떻게 사회적으로 연결되고 확장될지에 대해 궁금했는데, 이는 일종의 협의체 구조, 거버넌스 플랫폼 같은 기구나 장치 안에서 ‘더’ 발화될 수 있는 장을 실제 마련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라는 구상과 함께 생각한 부분이었다. 이는 어떤 관객의 말처럼 스탠드업 코미디로서 완전할지도 모른다.
곧 하나의 예술 형식 안에서만 그 자체로 소구될 수 있는 특별한 감각과 정동의 차원으로서만 공연은 유효한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공연은 실제적 연결보다는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차원의 예술의 효과로서 작동하며 갈음되는 것이 중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정현 씨 역시 “저를 알리고 싶었어요.”와 같이 그 스스로가 연설가가 아니라 그 역할의 배우임을 은연중에 자각하고 그 현장의 효과를 즐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역시 그러하다.
따라서 〈정현 씨〉에서 정현 씨의 말이 어떻게 정현 씨의 욕망을 건드리고 그것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따라 가는 것이 실은 공연이 진짜 말하는, 공연이 진정으로 좇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동시에 〈정현 씨〉가 보여준 건 정치와 예술이 각각의 장이 아니라 실은 상호 함입되고 재분절되는 것이라는 것, 그 자체가 아닐까. 그가 발화할 때 그는 시민의 (비어 있음의) 자리를 상정한다. 동시에 몫 없는 자의 예술의 자리를 상정한다―공연은 몫 없는 자의 예술의 자리를 주창한다.
〈정현 씨〉는 꽤 단출한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를 말하게 하고, 그를 비추고, 그가 자신에 대해 말하도록 하며 듣는다. 곧 〈정현 씨〉는 말하기의 자리이기도 하지만 듣기의 자리이다. 그것은 장애 여부와 상관없는 예술의 터전을 만들 때 실은 선행되어야 할 예비 절차 같은 건 아닐까. 그가 예술에 대해 무지하(다면 그럼에도 그에 대해 그리고 우리에 대해 편견이 없)다면, 우리는 그에 대해 무지하(면서 아마도 편견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아마도 더 크)기 때문이다. 〈정현 씨〉에서 정현 씨가 보여준 탁월한 역량은 무대라는 것을 동시에 가시화한다.
〈정현 씨〉는 그 무대를 만드는 일이다. 곧 발화의 근거 이전에 발화의 효과, 그 발화의 특수성과 일시성이 중요하다. 이는 각종 광화문이나 여의도에서 벌어진 세월호와 탄핵, 내란 등과 맞물려 벌어진 여러 집회, 시위에서 단상에 오른 이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목소리가 생생하고도 그 자체로 정동적인 것임을 상기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반면, 정현 씨는 실제의 공간을 가설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무대일 것이다. 그가 구상하고 상상한 존재들이 한데 오르는 무대, 동시에 그 무대를 가능하게 하는 시간이 상연되는 곳으로서 말이다.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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