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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페르튜토 스튜디오, 〈다페르튜토 서서울〉: 고래 뱃속이라는 상상적 공간REVIEW/Performance 2026. 5. 10. 21:43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의 〈다페르튜토 서서울〉ⓒ이동웅, 이지영[사진 제공=서울시립 서서울미술관](이하 상동).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의 〈다페르튜토 서서울〉(이하 〈서서울〉)은 서서울미술관의 일몰에서 일출까지의 시간 안에 세 개의 이야기를 구성하는데, 일몰과 일출은 극장을 세계의 제의 공간으로 재처리함으로써 성립하며 이때 각각 서쪽과 동쪽은 높은 층고에 천장과 거의 맞물린 창문이 바투게 지상을 경유한 공간 내 그 창문 방향의 커다란 해의 전면 도상과 그 맞은편의 역시 블라인드를 열어 벽 내부에 숨겨져 있다 드러나면서 긴 벽면을 따라 사선 아래를 향해 투여되는 서치라이트로서 대별되며, 곧 스펙터클의 오브제-빛의 점멸로써 갈음된다1.
일몰과 일출로 시간을 되돌리는 경로 안에는 세 개의 이야기 토막이 있는데, 이는 일종의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의 모듈형 창작 방식이 적용된 것으로, 그것은 오브제들의 측면에서는 일상 사물들의 아상블라주적 공작과 이전 작업의 오브제를 기본 토대로 사용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나타난다면, 서사의 차원에서는 짧고도 간단한 이야기 토막들을 구전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출현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짧은 이야기는 전자의 사물-신체의 이미지-공간으로의 확장을 경유해 엄밀히 구현된다기보다 ‘투사’되는데, 이때 타이핑-자막으로 실시간 입혀지는 선제하는 언어는 그야말로 ‘희미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그것에 작용한다.

이때 환유적 차원에서 신체의 사물과의 접합으로서 이행은 일시적이고 임시적이며 (그들은 그 이행의 순간과 함께 곧 사라지는데) 이는 서사의 “등장인물”이 세계의 ‘주인공’으로서 직접 발화하지 않는 것으로 소급될 수 있다. 곧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의 이번 공연을 비롯해 근래의 작업들 대부분에서 세계 내 존재의 양상은 독립적인 실체라기보다 무언가와 연결-접속된 오브제에 가까운데, 이는 그것이 세계의 ‘한’ 부분으로 자리하고 있다라는 것과 세계 내 ‘공’존재의 차원으로 분포되어 있다라는 것을 가리킨다.이때 퍼포머 자신의 고유성은 사물-이미지의 연장 안에서 감축되는데, 그것은 비주체성의 이미지와 반주체적 차원의 이념, 그 둘의 혼동을 파생시킨다, 또는 그 두 지점이 얽혀든다. 여기서 곧 발화자가 아닌 인형 조종사로서 사물에 연루된 주체 자체는 그 사물-인형의 현시 속에서 몰입하는 그 자신을 의도치 않게 바깥의 응시에 내맡길 수밖에 없어지는데, 이때 오브제의 절대적 지위는 비인간의 생태학 또는 ‘사물 공화국’의 이념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사물을 이미지로 가지고 노는 유희적 심미성의 차원을 위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응시의 비주체성은 모호해진다―퍼포머는 사물을 다루는 미학적 주체(로서 자율적)인가, 아님 사물과 비주체성의 사이에 갇히는 주체일까.
이야기는 먼저 ‘야훼가 큰 물고기를 시켜 요나를 집어삼키’게 하는 것으로 뿌려진다. 관객은 특정한 세계 ‘내부’ 공간에 있게 되는 셈인데, 이는 바슐라르(Gaston Louis Pierre Bachelard, 1884~1962)의 “모성적 공간”을 경유해 “‘안전한 고립’에 대한 상상력”으로써 전유된다. 그리고 이는 곧 “안양천”의 민물조개를 경유해, “연약한 연체동물”이 “나선형의 소용돌이”를 품은 “돌 속”에서 살아있는 존재―이는 성분이, 특성이 다른 배경-존재의 도식으로부터 집-인간의 도식으로 자연스레 연장된다.―가 지닌 신비로움에 감흥하면서 인간과 집의 관계성을 더 결착되면서도 절합되는 무언가로 재위치시킨다. 아마도 〈서서울〉은 이 특이한 ‘집’에 대한 접지/접근(에 대한 탐구)의 한 방식이며, 그것은 오브제와 주체의 ‘상관적 이행’ 관계로서 드러난다.

곧 적극의 〈어디로나 흐르는 광주〉(2025)―다페르튜토 스튜디오의 적극 연출은 다페르튜토 스튜디오로서 작품을 내지 않았을 때 역시 다페르튜도의 뜻 ‘어디로나 흐르는’을 고스란히 보존한다.―에서 물고기-헬기―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계엄군이 사격 용도로 동원했던 헬기는 천지창조 5일째에 창조된 물고기의 부정적/창의적 변용이다. 참조: https://www.artscene.co.kr/1984―였던 나무 구조물은, 그것이 재분절되었거나 실은 다시 조립되(어 줄)었거나 하는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는데, 이는 그 변용적 양태 자체의 개념이 작품 내재적으로 수용되면서 동시에 작품‘들’ 안에서 교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곧 여기서 “어디로나 흐르는” 건 사물들(로 이뤄진 가상의 집) 자체일 수 있다.
이는 절대적 양태로서 무언가를 지정하기보다, 곧 물신화하기보다 무언가가 생성되고 변용되며 달라지는 차원에서 연결되고 흐르며 그 즉시로 기입되는 차원으로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의 작업이 전적으로 쓰이고 있음의 견지에서 그러한데, 이는 사물의 변용 자체로 낙착된다기보다 아상블라주적 조합에 따른 더 확장된 운용 방식 안에서 가로놓이는 부분이다. 가령 노란 전기선과 연결된 전구와 같은 사물의 기능성을 고스란히 전용하면서 그것이 말아쥔 형태로부터 새 둥지로 수월하게 재의미화된다.
커다란 물고기는 조개껍데기 집이기도 하고,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그 안―구조물은 대칭되는 반으로 나뉘는 물고기 형상을 띤다.―에 있는 신체를 미지의 대상으로 노정한 후 그것이 벗겨지면서 연체동물로 전도시킨다. 곧 구조물이 어떤 식으로 위치된다라는 사실이 더 중요한데, 가령 처음의 활용 차원에서도 이등변 삼각기둥을 옆으로 세워놓은 것 같으나 그보다 더 다차원을 간직한 그 일종의 조개껍데기는 그 안에 무릎을 집어넣은 가운데, 신체로 합성되는 지점에서 ‘비로소’ 활성화된다―그것은 본래적 의미 자체가 없는 상관적 사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이 어떻게 놓인다는 지점에서만 의미화됨을 의미한다. 이 껍데기-집이 그럼에도 고정적이며 변용의 지수가 낮은 것임은, 빛의 사물로서 미러지의 활용에서 알 수 있다.

다양한 사물들이 활용되는 가운데, 이 미러지는 빛이 퍼지는 효과에 의해 공간 뒤쪽에서 일종의 그림자 극을 연출하게 되는데, 곧 본래의 사물이 재위치됨은 오직 그 확장적 효과에 의거한 구성의 차원에서만 합목적적인 것이 된다. 그러니까 퍼포머는 그 자체의 표현 양식이 아니라, 사물의 효과에 부속되는 사물로서 능동적으로 임한다―일종의 빛-인형의 조종자로 위치한다.
공간은 대단히 크고 따라서 파장은 길며, 미러지의 틈은 매우 급격하게 만들어지므로, 미러지를 걸친 채 펴고 접을 때 그 좁은 틈으로부터 반원형의 회절이 각각 마치 눈동자처럼 바닥과 벽면으로 대칭적으로 확장되었다 사그라드는 경로로써 쉬이 구성된다. 그것은 일종의 물고기 형상을 띤다. 곧 (구조물과 달리) 물고기를 의태하기보다 의태해낸다.
마찬가지로 중앙의 긴 나무를 중심으로 그것과 나선형으로 꺾이는 선분이 수평으로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나무들로 이어진 형태, 마치 나선형 계단을 모형으로 축소해 놓은 것 같은 형태의 구조물이 그것을 깃대처럼 지지하고 우러러봄으로써 나선형 생명체를 의태하게 된다면, 또아리 틀어진 노란 전선과 필라멘트로 인공태양광을 내뿜는 전구 들은 새 둥지를 의태하지만, 빛을 띠며 어둠에서 식별됨으로써 그것의 발견됨이 갖는 (기이함 대신에) 특별함으로 용해된다.
각종 공단이 자리했던 서서울미술관 부지의 역사-장소성에 비추어, 신경숙의 소설 『외딴 방』도 주요하게 활용된다. 외사촌 언니와 함께 귀경해서 구로공단에 일하면서 37개의 외딴 방에서 살아가는 화자의 이야기는, 외딴 방의 재현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것은 새 둥지를 그것으로 다시 쓰는 것이기도 하고, 공간 전체를 묘사에 따라 재분절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개인의 심리적이고 실존적 차원과 결부되는 차원이라면, 그것은 자연으로 확장되면서 본래의 출발선상으로 되돌아온다.

곧 더 큰 은유는 일출과 일몰, 곧 해와 달의 현현이다. 반사경을 몸체로 두면서 얼굴과 사지를 그 바깥으로 펼쳐 내는, 곧 반사경-신체의 아상블라주를 이루는 퍼포머가 그 빛이 확대된 원 아래 다시 부속되는 이미지 연출은, 껍데기 집을 갖춘 연체동물이 서쪽 해로 증대하고 있는 모습과 같다. 또 반사경을 마주하면서 랜턴을 턱 사이에 끼워 두고, 곧 팔은 반사경의, 턱은 랜턴의 지지체가 되어 움직일 때 그 퍼포머가 만드는, 그러나 ‘보지 않는’ 종국의 이미지는 바닥의 그믐달 그림자다.
예컨대 〈서서울〉은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에서 언급한 요나 콤플렉스가 어머니 태반에서 느끼는 편안함, 그 귀소본능에 대한 것으로 언급됨을 모티브로 가져오는데, 이는 죄를 지은 요나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고래에 삼켜지고 나서, 기도 후에 고래가 그를 뱉어낸 일련의 경과를 긍정적으로 전화시킨다. 처음 안양천의 조개를 경유해 곧 장소 특정형 신체로부터 신체의 외화된 형태로서 집을 이야기하다, 이 집 자체를 정신의 이미지로 재편하는데, 곧 빛이란 집을 만들며 상상적 이미지로서 그것이 현현하고, 그것이 다시 신체의 집으로서 확장되는 여러 경로를 발생시킨다.
이러한 과정은 일종의 놀이를 통해 출현 또는 창발한다. 이는 마치 안전한 집 안에서 고립되어 빛의 놀이를 통해 또 다른 집을 발생시키는 유년시절의 놀이를 은유로 재의미화되는 듯 보이는데, 이 신체를 무정형적으로 두며 그 오브제-이미지에 부속되는 퍼포머들은 어떤 정념과 정동을 갖지 않은 채 순수 놀이의 형상들을 만드는 데에만 오직 집중하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반대로 그 의미작용을 방해받지도 않음을 의미하며, 또한 그러한 조건 안에 절대적으로 의지함으로부터 출현한다.
곧 자율성의 조건으로서 집은 이 공간 전체에 대한 상상력의 차원―그것은 근본적으로 일몰과 일출을 대하는 자연 자체가 아니라, 그 자연을 모두가 현상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안’에 대한 구성적 경계로서 재편된 집과도 같다.―을 통해 전제되는 것이다. 〈서서울〉은 곧 이 둘을 교환하며 상호 함입적 관계를 이루는 과정 자체이다. 신체 바깥의 (신체와도 같은) 집, 그리고 집 속의 집, 또한 확장된 집의 경계로서 오브제가, 빛이, 공간이 각각 그리고 따로 또 같이 출현한다.
김민관 편집장
4. 11. (토) 19:00
4. 12. (일) 19:00
서서울미술관 지하 1층 전시실1
라이브 퍼포먼스
콘셉트•연출•무대미술: 적극
퍼포머•움직임 리서치: 김용빈, 도효성, 이유라, 임영, 최도혁
오브제 제작: 중간공간제작소
음악: 해미 클레멘세비츠
조명 디자이너: 박현정
영상 감독: 림벌트
조연출: 정찬동
서울시립 서서울미술관 커미션 기획 제작 이성민
제작: 운영 곽소민, 김수나, 박수정, 이소영, 이지연, 임다울, 이도현
조명 공연화, 김세현, 신유미, 박지원
음향 김성욱, 이원석, 전희주
영상 엄현수, 왕종민, 오승현
무대 이도엽, 이유성, 김지수, 김진태, 손성현
사진 이동웅, 이지영, 서울시립 서서울미술관(2026.4.12.)
주최 서울시립미술관
- 1. 서울시립 서서울미술관 개관 전시 《호흡》의 일환으로 열린 이 공연은, 블라인드를 여는 것을 결정적인 전환의 차원에서 사용한 다른 공연―황수현 안무가의 〈세계〉, 노경애 안무가의 〈천사〉―에 비해 그 창문과 반대편의, 두 축의 블라인드를 모두 사용했(다는 점에서 예외적이)고, 이를 지정학적 위치의 범주 안의 관념으로 가져옴으로써 극장을 세계 자체로 연장시킨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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