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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지후, 〈여는 마당: 프로파간다〉: 극장과 광장 사이의 간격 없음으로부터…
    REVIEW/Theater 2026. 5. 20. 13:18

    심지후, 〈여는 마당: 프로파간다〉ⓒ김인경(이하 상동).

    〈여는 마당: 프로파간다〉(이하 〈여는 마당〉)의 제목은 “프로파간다”를 위한 공공적 장소를 허용한다는 점에서, 공론적 장소의 자리를 일정한 방향성을 띤 프로파간다―선전―로 점유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인데, 이것에 구체성이 부여되는 건 2부의 극장 천장에 매달린 수많은 “말풍선”들이 내려오면서부터이다. 이는 이미 다양한 참여자에게서 받은 설문들로 민주주의에 대한 각자의 사고와 의견 들을. 담고 있으며, 그것의 개별적 포장의 형식/명명은 개인의 자율성과 주관성을 다양성과 상호 존중의 차원으로 격상하며 민주주의의 이념을 하나의 이미지로 현시하는 것과 같다.

     

    물론 이 실-집게에 꽂힌 제목/번호와 본문―진술―을 적은 각기 다른 A4 두 장을 앞뒤로 붙인 매달린, 흔들리는, 돌려 세울 수 있는 개별적 이미지들은, 제각기 다른 내용을 담는 텍스트의 실질로 모두 다른 가운데, 동시에 그에 비견되는 수많은 관객이 그것을 마주함으로써 그것을 읽어내려는, 인격을 체현하려는 어떤 “경청”의 노력으로써 작동하는, 증폭하고 증식되는 네트워크의 노드와 같았다. 〈여는 마당〉은 이 말풍선 하나를 고르며 그것들을 마주하는 감각을 수여한 이후에, 그것을 각자의 언어로써 전유해 내도록 한다.

     

    각자의 주관성이 극대화되는 자율성의 영도를 “프로파간다”로 명명할 때, 그것은 충분히 광장의 정치를 상기시키는바, 말풍선은 광장 이후의 시간에서 쓰이는 이념으로서 광장에 대한 물화로서, 관객은 다 대 다의 방식으로 이 광장을 개인(들)의 방식으로 목격하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어떤 떨림이나 공명과 같은 현장의 정동 차원을 거의 (음)소거한 상태이다. 그렇게 선전물은 다분히 위험하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차원에서 ‘은밀하게’ 전달되며, 광장은 각기 다른 생각들을 잠재하고/감추고 있는 곁의 존재들로써 유지되고 보존된다.

     

    한편으로, 이 소리들은 가시화되고 관성화된, 과잉 대표 되고 세속화된 정치 너머에서, 비가시화된 정치적 주체의 차원을, 그것이 프로파간다라는 오해 혹은 위협을 감수하고서라도, 현상하는 것이, 현상하는 채널이 필요하다는 걸 그 자체로서 말하고 있는 것일 수 있는데, 일종의 단상을 체화한 이 각자의 프로파간다는 공준되기보다 정동적으로 수용되거나 거부되며, 일말의 진실, 곧 그 말이든 그 사람이든 간에 어떤 진실의 차원에 접근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는 따라서 대리/대표로서 민주주의의 제도적 장치를 직접 민주주의의 차원으로 바꾸려는 노력일 수도 있는데, 곧 〈여는 마당〉의 수행(이 갖는 순수성과 위험성)은 곧 수많은 목소리가 존재하는 광장의 정치를 ‘믿고’ 재현하려는 데 있다. 곧 모두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받고 제시하는 것 자체가, 그러니까 광장이라는 방만한 장소를 압축적으로 따라서 자의적으로 세공하여 구성함으로써 산만하고 분열적이며 종합 가능하지 않은 어떤 ‘세공되지 않은’ 말들을 ‘여는’ 지점에서, 곧 개인 대 개인, 선전물로서 프로프간다(의 양식적 소환이)라는 감압된, 감축된 경로를 거침에도, 그것은 여전히 프로파간다‘에’ 대한 편견과 프로파간다‘의’ 편견을 프로파간다-광장의 낭만성 안에서 혼동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이 광장이 안전할 수 있는 건 이것이 순수하게 광장이기 때문일까―아님 극장이기 때문일까. 〈여는 마당〉이 결국 보여주려는 건 개인‘들’이 아니라, 개인들의 집합적 토대, 서로의 안과 바깥이 되어주는 광장의 장소성 자체일까. 그것으로의 환원인가. 누구나 생각과 표현의 자유가 있으며, 나아가 집회의 자유가 있으며, 그것은 광장이라는 장소 안에서 상호 존중의 질서에 입각해서 펼쳐질 수 있는 것임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일까. 곧 광장 ‘안’보다는 광장의 경계 자체를 보여주려는 것일까. 아님 비가시적이지만 그로부터 소급되는 개별적인 차원의 사유와 재정치화를 달성하려는 것일까.

     

    “극장은 수행이 실제가 되는 곳”, “재현이 실재보다 먼저 발생하는 곳”, 그리고 “남의 언어”를 “나의 언어”로써 옮기는, “수행”하는 곳으로 전제된다. 곧 ‘남의 언어’에 대한 재현은 ‘나의 언어’적 수행성을 기초로 하며, 또한 ‘너의 언어’는 ‘나의 언어’를 촉발하는 매개체가 된다. 중요한 건 재현‘됨(의 내용)’이 아니라 재현‘함(의 역량)’으로, 이 수행의 차원을 관객에게 덧입히는 것이 〈여는 마당〉의 주요한 전략이자 장치이다. 그러니까 〈여는 마당〉은 배우라는 “나”가 아니라 관객이라는 “너”를 (비가시화된 대상에서 가시화된) 주체로 격상시키려 하는데, 이때 관객은 극장 전체를 점유하고, 한 명의 배우(한혜진)는 “어떤 관객”으로 가정됨으로써 그러하다.

     

    1부가 아르코예술극장 앞 마로니에공원에서 실제 집회의 현장을 구현한다면, 2부는 아르코예술극장의 무대 출입구를 통해 입장하게 되며, 관객이 말풍선-민중의 하강으로 인해, 회전 무대의 원형으로 파인 홈 안쪽으로부터 잠시 물러나게 될 때를 제하면, 무대는 온전히 관객의 몫이 된다. 내레이션-자막은 현장의 물리적 요소들을 설명하는 것, 곧 일종의 접근성 차원으로 보조되는 언어로써 시작해서 그 대상을 관객으로 옮겨 간다. 이 음성해설-내레이션(박하늘)은 ‘어떤 관객들’을 계속 지시해 낸다.

     

    이때 관객은 대상화의 수치를 일정 정도 안은 채 하나의 경계 안에 묶이게 되는데, 사실상 그 지시는 별다른 특색이 없는, 따라서 두루뭉술한 것에 가깝다. 그것은 관객을 분별하지만 일별하게 하는 것까지에 이르지는 않는다. 중요한 건 관객이 묘사되면서 어떤 생각을 한다는 것과 같이, 그 말은 관객의 심리적 차원을 일정 부분 조작하고 변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뚜렷한 자신의 말을 하는 대신에, 온전히 프로프간다를 위한 장, 관객이 주체인 장을 만들기 위해 그 장은 투명해져야 하는 전제가 자기 한계와 모순을 만드는 균열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관객을 물리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끌어내는 이 언어가 집회 현장의 언어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사실 개인의 자율성, 광장에서 공동의 전선과 극장의 주어진 수행성이 어떻게 맞물리고 간섭하고 교차되며 미끄러지는지 등등을 조금 더 세심하고 엄격한 차원으로 점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부에서 우리가 프로파간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그것이 다양한 목소리의 차원에서 대체된다는 것이다. 그것들을 다 끌어모아 한 자리에서 펼쳐내는 형식을 만든다는 것이 앞선 말풍선들의 뒤섞임의 진열 방식처럼, 〈여는 마당〉이 프로파간다를 무한하게 허용하면서 각자의 의견으로 수렴시키면서 이륙하는 민주주의의 이념인 것이다.

     

    사전에 집회 참여 관객은 양면으로 된, “[   ]이 민주주의를 완성한다/민주주의 완성으로 [내란세력 청산]하자!”라는 피켓을 완성할 것이 요청된다. 이를 최소의 틀로써 최대한의 자율성의 사유를 담보하는 수행적 장치라 한다면, 극장에서는 말풍선 하나를 선택하여 자신의 언어로 바꾸어 말하는 것이 그 연장된 장치가 된다. “광장의 민중이 극장의 관객이 된 지금”은 곧 전사, 앞선 집회의 체험을 강제적이고 논리적으로 요청한다. 따라서 집회의 재현이 갖는 강제성은 하나의 전제이며, 그러한 전제는 집회가 갖는 강제성 자체를 합리화한다.

     

    이 부분에서 〈여는 마당〉은 다소 모호해지는데, 곧 피켓에 흐릿하게 적힌 “내란세력 청산”이라는 문구가 그러하다. 곧 〈여는 마당〉의 직접적 모티브는 12·3 내란 이후의 광장이지만, 처음 집회 단상의 발언이 그 이후의 응당한 자유가 무언가 그것을 누릴 우리의 자격과 합치되는 것은 아니라는 어떤 반성적 차원, 그러니까 시대의 외적인 차원에서의 변화 대신에 내적 차원에서의 쇄신 과정을 조금 더 가져가야 한다는, 유예되고 지연된 시차 아래에서 (동)시대적 정신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으로부터 〈여는 마당〉이 출발하고는 있지만, 실은 ‘두’ 개의 무대를 건너는 과정에서, 다양한 민주주의의 구성원의 각자의 몫으로 확장되는 가운데, 하나의 시간성이 분산되고 망각되는 결과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는 마당〉의 내란이라는 내용은 광장이라는 텅 빈 형식 안에 기입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 형식으로써 불분명해지는데, 이는 민주주의의 ‘개선’이라는 차원에서 진보적 시간이 불가능하다기보다 근본적으로 모호한 지점에 봉착했다는 것, 곧 앞선 발화의 맥락에서처럼 아직 이전의 시간이 물리적으로 단락되었지만 또한 정리되지 않은, 동시에 의식적 차원과 부합하는 진정한 혁명(인)을 기다리는 잠재적 차원의 시간이며, 그리고 목적을 상실한, 또는 새로운 목표를 찾지 못한 과도기적 상황에서, 마치 우리는 광장을 ‘복습’하고 그 자체를 물신화해 체현해야 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극장이 광장이 된다기보다 광장을 전유함이 필요하며 그곳이 (내가 서있는) 극장이 된다는 것, 그 사이에서 어떤 당위를 심지후는 찾아냈는가, 또는 찾으려 했는가. 광장과 극장 간의 연계성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것인가. 광장은 왜 극장으로써 (공연 내에서 또 공연 자체로서) 한 번 더 반복되어야 했는가. 극장에서 광장을 찾는 건 가능하지만, 광장에서 극장을 찾는 것이 역으로 이 극장에서 가능한 것일까. 극장은 왜 광장에 복무해야 하는 것일까. 또는 극장은 민주주의 의 광장과 오늘날에도 합치시킬 수 있는 것일까―고대 그리스 극장은 이상적으로는 직접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한 곳이지만, 오늘날 역으로 그 대상이 여성과 노예를 배제한 성인 남성 시민만을 의미했다는 것에서 이 극장은 굴절된 민주주의의 상을 제시한다.

     

    〈여는 마당〉은 극장을 관객이 자율성을 되찾는 곳으로, 그리고 민주주의의 현장을 재방문하고 재학습하며 직접적인 주체로 거듭나는 곳으로, 사유와 경청, 표현과 논의가 가능한 곳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것은 광장을 (실질적으로/새롭게) 정의하기보다 극장을 (부차적인/기존의 것으로) 정의하는 것에 가깝다. 곧 그것은 극장을 광장으로부터 새롭게 정의하기보다는 광장에 ‘더’ 적합한 장소로서 극장을 정위시키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필요한 것은 광장에 대한 재사고로써 극장을 다시 쓰기, 번복하기이다. 누락되고 소거되는 건 어쩌면 극장(성)이다.

     

    첫 번째 참여자의 발언에서처럼 “준비가 안 된 것 같”은 현재의 시기는, 거꾸로 광장의 시간이 계속 유예되며 지속되고 있는 시기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동시대적인 것이라면 (합리적으로) 심지후 역시 광장으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그는 그 이전의 장소로서, 본래적인 자신의 장소로서 극장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광장 ‘이후의’ 장소가 된다. 이때 광장이 극장을 침식하고 덮어버림으로써 극장은 자율적 장소로서보다 광장을 본딴, 광장의 자율성을 실험하는 타동적 장소가 되어 버리게 된다. 아마도 이 지점을 가설로 전제한다면, 앞선 관객에 대한 지침이 관객을 정위시키는 차원으로 질서화되는 지점의 모순 같은 것이 더 명확해질 것이다.

     

    그런데 내란 이후, 무언가 우리가 커다란 실질적 구체적 동력을 잃어버렸다는 전제 아래, 그처럼 우리 안의 혁명적 사태를 재출현시켜야 된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극장은 또 다른 시간들을 흘려보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곧 극장의 자율성과 극장의 시간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간접적으로 말하는 걸 듣는 것―그것이 예컨대 ‘사유’일 것이다.―은 혁명이 아닌 것이 아닌 게 아니라, 그 자체로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아닐까. 따라서 〈여는 마당〉에서 기억해야 할 건 다시 극장인데, 어쩌면 역설적으로 광장(의 시간)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극장 자체를 고립시켜 생각할 수 없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비가시회되는 국면, 곧 외부로부터 차폐되는 공간의 극장성이 절대적인 시간의 내부를 점유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광장의 가시화되는 국면이 절대적인 외부로의 개방성과 그것과 합치된 시간성을 낳는 것 역시 아닐 것이다. 〈여는 마당〉에서 다른 이의 말을 수행하는 건 그 말을 프로파간다 자체로 내세우는 것이라기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임시적이고 불안정한 시간 내에서의 ‘모두의 단상’을 여는 광장에서 시민 개별 차원의 정치적 프로파간다의 일면을 대리한다. 그것은 사실 한 명의 실행되지 않은, 합의를 구하는 의견으로 남는다.

     

    이때 그 말 자체를 그 바깥에서 감각적이고 논리적으로 사유하여 선택하고, 곧 “동의” 여부를 결정하고, 곱씹고 자신의 말로 최종 발화할 때, 그리고 개인의 시간에서 열린 광장의 시간을 복구할 때 ‘보이지 않는’ 극장―마치 음성해설의 배우가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이―은 군중을 시민으로 식별하고 있었고, 자율의 시간을 주었으며, 곧 극장이 가진 비가시화된 외부성으로서 시간을 가시화했으며, 타자를 증여받고 자신을 재창출하여 각자의 프로프간다-말풍선을 발화하는 것으로써 극장의 무한한 열림을 시험한다.

     

    이 ‘다중’ 시간은 자율적이며 자의적이며, 그 지점에서 모두를 주체-대상으로 만든다. 그러니까 그것을 식별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거대한’ 극장뿐이다. 이는 왜 마당‘을’ 여는 것이 아니라, 마당‘이’ 여는 것이 되는지에 대한 참조가 된다. 곧 광장의 정치성이 열리고 복구되며 가능해지는 시간은 그것이 광장 그 자체로서라기보다 광장의 이념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며 어떻게 작동하게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가운데, 아마도 진정한 것이 될 수 있다. 곧 관객을 시민으로 경유하고 시민-개체로 분화시키는 〈여는 마당〉의 최종 경로는, 극장에 외부를 도입함으로써 비가시화된 관객이 하나의 시민 질서를 창출해 가는 주체로서 자신을 확인하는 데 이른다.

     

    그 결과는 작품‘에’ 실리지는 않으며, 다만 시민-관객 개별적인 차원에서만 각각 다르게 함입된다. 따라서 〈여는 마당〉은 극장으로써 광장을 전유하지만, 결국 극장을 다시 정의하는 것에 가깝다. 그것은 새삼스럽게 극장에 절대적으로 전제되는 관객이라는 존재의 가시화이며, 그들이 작품 내에 있지만은 않으며, 실은 처음 제시된 것처럼 “일상”과 “극장”을 잇고 있는 존재이며, 동시에 시민으로서 포함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결론으로 제시한다기보다 이러한 사실 안에 관객을 포함시키는 방식으로써 〈여는 마당〉은 전개되며, 그것은 광장‘이 아닌’ 곳에서 광장이 실현될 수 있느냐의 차원에서 분주하고도 급격하게 실천된다.

     


    그것은 의도치 않게 극장의 잠재성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광장의 시간을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 그것을 애도하는 차원에서 그것을 재학습하는 차원에서 다소 성급하게 추진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필요한 건 그 광장의 시간과의 거리 두기이며, 그것은 광장 자체가 우리에게 수여한 사유를 전개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아마 1부가 광장은 사실 계속 재건되어‘야 한다는’ 것이라면, 그리고 계속 되고 있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면, 2부는 우리가 그 주체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는 걸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진정 모호한 건 우리가 우리와 관련된, 우리가 관심을 갖는 어떤 것을 의제화하는 능력을 함양하는 것, 연습하는 것이 1/n의 극장으로 배가되고 동시에 약분된 이 극장에서 어떤 하나의 목소리와 그 파급 효과로도 이어지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곁에 머물러 있고, 가까이 가면 들을 수 있지만, 여전히 광장의 확성된 무대의 차원이 소거된 개별적 위치들을 수호하는 중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광장을 끝없이 유랑하는 형식과 같다. 이 다양성의 의제, 그러니까 의제의 산만함과 흐트러트림으로 인한 약화된 광장, 또는 다중 광장은 역설적으로 형식적인 차원으로 남는다.

     

    사실상 어떤 것도 실질화되어서는 안 된다. 곧 정치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 지점에서 극장은 관객을 시민으로 환원 짓기도 하지만, 여전히 시민의 외양으로서 안전하게 보존하기도 한다. 관객은 시민으로 정의되지만, 여전히 관객으로서 일정한 대본을 수행하는 데 그치는 따라서 타동적인 배우의 자격 안에서 그 대사를 전하면서 그것이 어떻게 감각되는지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매개의 위치를 수여받는다. 그것은 광장의 무대로서보다는 극장의 제도적 차원을 되불러오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일정한 거리가 만들어지는 지점에서 말이다.

     


    〈여는 마당〉은 관객을 광장의 일원으로 전제하면서 광장의 이전 시간을 극장으로 연장한다. 그런데 애초에 광장과 극장의 거리는 〈여는 마당〉이 시작된 발로였다. 그러니까 심지후는 이중의 곤궁 아래 있는데, 하나가 광장이라는 실재성이라면 다른 하나는 극장이라는 이물감으로, 이 둘을 각각의 차원으로는 해소하지 못하며, 따라서 과제는 그 둘을 연합해서 해소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지만, 필요한 건 광장 자체가 아니라 광장의 시간을 어떻게 재처리하느냐에 있다.

    이러한 곤궁은 실은 〈여는마당: 프로파간다 연습용 관객 시뮬레이션〉에서는 심지후의 자기 고백을 그의 페르소나로서 한혜진이 분해 극장 뒤쪽에서 발화하는 마지막 장면으로 이어졌었다. 하지만 실제 공연에서 이 부분은 빠지게 되는데, 이는 더 많은 인원의 참여로 불어난 시간을 참여의 토대 자체로서, 개별적 몫과 시간의 차원 자체로서 갈음하는 것을 공연의 윤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곧 관객을 재정형화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측정되거나 환류될 수 있는지를 공연의 형식으로는 직접 가져가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본래적인 극장성을 실천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 당시 제시된, 집회를 ‘삽입’하여 광장과 극장의 차이에 대한 식별―“집회참여와 공연관람에서의 차이가 경험되는지?”―과 수행의 효과에 대한 실험―“반복발화 시 어떤 충동이 들며 어떤 상태 변화가 감각되는지?”―이라는 두 가지 “목표”는 기본적으로 실제 공연에서도 같은 형식으로서 보존되지만[각주:1], 왜 광장이 극장의 출발점이 되었는지에 대한 연출의 자기 고백은, 그러니까 광장 이후의 해소되지 않은 감정, 그리고 극장이라는 것의 알레르기를 증상으로 드러내는 진정한 한 개인으로서 배우의 발화는 사라지게 된다.

     

    그것은 마지막에 무대와 객석을 가르는 얇은 하얀 막을 걷어 올려서 빈 객석이 펼쳐지게 될 때, 단상이 극장성을 경유해서 현전하게 되는 순간을 발화가 점유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데, 따라서 이번에도 (이전보다 더) 결정적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관객의 상태를 지시하고 가시화하며 인도하는 ‘불투명한’ 차원에 그치며, 헛헛한 차원으로 극장을 빠져나가게 된다. 〈여는 극장〉은 극장성을 텅 빈 물리적 실재로 제시함으로써 광장의 시간이 끝난 이후를, 곧 개별화되는 시점을, 동시에 광장은 오직 우리가 한데 모여 있는 이곳 자체일 뿐이었음을 제시한다.

     

    그러니까 이 결말은 저(광장) ‘너머’에는 실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이데아라는 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까[각주:2]. 〈여는 마당〉은 의도적으로 클라이맥스를 지우고, 평평한 일상의 시간으로서 극장의 시간을 연장한다. 그것은 다만 타자를 함입하고 또한 타자를 형식으로서 만나는 자기 변증법적 차원에서의 변화만을 수용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광장의 정치성일까, 극장의 정치성일까.

     

    김민관 편집장

     

    [공연 개요]

    2026.05.09 ~ 2026.05.10

    1부 집회: 오후 2시에 마로니에 공원(서울 종로구 대학로 104)

    2부 극장: 오후 4시에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개념발안/연출 심지후 

    콘셉트/드라마투르그 안태은
    공동구성
    김강리 김남현 민현기 심지후 안태은 이라임 장지영 전혜정 한윤미
    말풍선 큐레이션 안태은 전혜정 심지후
    관객 시뮬레이션 장지영
    연출부 전혜정
    진행총괄 한윤미
    진행 강정인 백소정 임현진 정찬미
    집회총괄 민현기
    집회기획 김강리 단풍
    집회자문 조진영
    출연 한혜진, 모인 사람들
    공간 이라임
    공간크루 이선 이수림 박승훤
    조명디자인 탁형선 ARKO

    음향감독 sesame yoo(유아림)
    음향크루 김동민
    현장영상 남아름
    기록영상 크루 김극렬 오승은
    기록사진 김인경
    PD 김남현
    홍보 김민수(MK)
    써드아이 박지선
    접근성기획 성다인

    안내보행 윤제선 성수연 전서아 

    음성해설 박하늘
    수어통역 남진영
    안내수어통역 박선홍
    문자통역 장정수
    그래픽디자인 임민재
    집회그래픽 남선미
    집회오퍼레이터 배명인


    주최·주관 심지후
    공동기획/접근성운영협력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
    문의 050-6850-8105

    1. 1. 성균관대학교 인문사회캠퍼스 정문에서 모여, 그 앞 공원에서 집회를 열고, 이후 성균관대학교 경영관 지하 3층 소극장까지 어떤 구호 없이 개별적으로 이동(이번 공연에서는 실제 집회에서처럼 기작성한 관객 각자의 피켓의 문구를 주로 외치는 것으로 변화되었다.)한 후, 그곳 극장에서 2부가 열렸다. [본문으로]
    2. 2. 이는 공교롭게도 거의 동 시기에 열린 대학로예술극장의 무대에서 시작해서 막으로 가려져 있던 극장 뒤쪽 객석을 마지막에 보는 것으로 끝난 〈제일 가까운 장애인화장실이 어디죠?〉와 같은 구조로, 반면 이 작업은 객석을 극의 연장선상에서 환상적 대상으로 전치, 상승시켰다. 당시 공연에 대한 기록을 참조할 수 있다. https://www.artscene.co.kr/211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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