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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타이헨, 〈브레인〉: 생명의 탄생과 역사, 그리고 우연적 존재들의 분투를 기입하기REVIEW/Theater 2026. 5. 27. 13:38

극단 타이헨, 〈브레인〉©옥상훈[사진 제공=(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제공](이하 상동). 〈브레인〉은 생명의 탄생에서부터 어류, 포유류, 직립하는 인간에 이르는 생명의 일대기를 수십 개의 막을 열고 닫는 것으로써 편집해 보여주는데, 이때 원형으로 둘러쳐진 막은 자동 제어에 의해 매끄럽고 일정하게 열리고 닫히는 대신, 다만 그 경계를 오고가는, 더 정확히는 구르는 하나의 신체 양식을 따르는 신체들에 의해 달싹거리며 하나의 틈으로만 드러날 뿐 기본적으로 닫혀 있다. 곧 신체는 막의 연장이면서 막 너머의 세계로 ‘퇴장’하는 대신 그 막 자체가 된다. 신체는 막을 초과하지 못하며 그것을 침투할 뿐으로, 동시에 막은 무대와 무대 바깥의 경계를 가르는 기준이 아니라 신체로써만 표지되는 영원한, 어둡기보다 (불)투명한 사물이 된다. 이때 신체와 막은 교환되고, 신체 자체가 막이 된다.
〈브레인〉은 여러 시간의 지층을 단면으로 보여주지만, 이 막의 닫힘으로 인해 좁아진 채 그야말로 ‘반경’ 안에 뒹구는 신체에 초점의 밀도를 높이는 동안, 현실 너머의 세계, 인간 이전의 시간, 어둠 안에 공진하는 문명 이전의 생명을 그러니까 안이 아니라 바깥의 차원 ‘안’에서 그야말로 포집한다. 이때 그들은 경계로부터가 아니라 경계로서 어떤 흐르는 액체처럼 꾸물거리며 새어나온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미스터리를 품고 있는 신체로서, 안과 바깥의 차원을 근본적으로 혼동케 한다. ‘열리지 않는 무대’는 환유이면서 동시에 은유로서 무대 이전, 인간 이전의 시간을 상정한다.
생명체의 시작은, 곧 극의 시작은 하얀 덩어리로서 신체가 막에 붙어 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는 그 바람 소리에서처럼 바다 속을 환유하는 대신 실재의 사막에 놓인 생명의 버둥거림에 가까워 보인다. 곧 생명의 경계를 표식하려는 몸짓이면서 아직 잠재적인 차원에서 용출됨을 보여주는 듯 보인다. 거기에는 얼굴이랄 것이 없으며, 당연히 “브레인”, 분화된 뇌 기관 역시 없다. 신체-뇌의 산포된 스펙트럼으로서 하나의 몸이 있다. 여기서 실존적 몸부림은 필연적인 것이고 (그것이 미래적 차원을 담보하지 못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정서적 차원을 배제한다.
바람에 섞여 간헐적으로 구음이, 또 신음이 섞여 오지만, 그것은 바람이란 실재적 관념의 ‘틈’에 머물 뿐이다―그에 따르면 틈은 생명의 ‘겨우’적 탄생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낮게 깔리는 음성, 흐미 창법을 차용한 이 음성은 아무래도 대타자의 출현을 목도케 하는데, 그것은 불쾌한 잔여로서 그 자체적인 시간, 곧 실제로 이 구분 안 되는 덩어리, 포자나 분자 단위의 집적체가 막으로서 사라진 이후에 어둠 속에서 길게 등장한다. 그것은 앞선 바람의 물리적 연장으로서 대기의 무게를 언어로서 치환한 것이기도 하겠는데, 그야말로 ‘중압적’ 목소리는 생명 자체에 대한 압력이면서 생명의 선언에 대한 권위를 스스로에게 수여한다.
그러니까 존재의 탄생과 함께 신의 탄생이 시작된 것일까, 아니 그보다는 그 존재의 탄생을 보이지 않는 작용과 함께 지켜보던 신이 비로소 언어라는 매개를 사용하게 된 것일까. 그러고 나서 객석의 정면을 향해 나란히 엎드려 있는 신체들이 출현하는데, 그것은 고개를 겨우 드는, 땅에 고개가 처박히는, 땅에 흡착되는 얼굴들을 가진 몸들로, 따라서 처박고 있는 건 아니지만, 마치 불가능성을 가늠하는 수준에서 고개를 겨우 들어 보이려고 하는, 모호한 중간적 상태의 몸을 표현한다. 사실상 고개는 얼굴의 가시화를 위한 몸짓이 아니라, 곧 생명체의 부분 대상으로서 깔딱거림을 가장 일차원적 차원에서의 분절이 미세한 강도로서 신체를 분별하는 차원에서 펼쳐 내는 것에 가깝다.
타이헨 극단의 몸은 거의 바르바식 전표현적 단계에 머무르는데, 일종의 누에꼬치로서 몸이 그것이다. 앞서 처음의 등장 때 모습이 얕은 바람에 흔들리는 식물의 가지에 붙은 번데기 같은 형상인 것처럼, 전반적으로 땅과 유착되면서 정위되지 않고 굴러다니는데, 그것이 기능적 차원이 아니라 세부 분절과 전체의 진동이 분화되는 장소로서 신체를 고안해 내는, 그리고 지켜보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이 멈춤 속에서 고개의 주억거림은 그보다 고개의 떨궈짐은 독특하게도 뇌의 지배적 작용에 반해, 뇌를 포함한 고개의 무게, 그리고 일차원적 신체 분절의 시작이 지닌 지난함과 어려움 모두를 타동성의 차원에서 우세한 것으로 전이한다.
그러니까 이 안무는 뇌가 채 미치지 못하는 신체의 수동성을 신체의 어찌할 수 없음의 차원에서 중력적 현상이 지닌 진리의 법칙으로 전도시킨다. 하강이라는 부정성을 간직하고 보존하는 지점에서 고개는 육지, 땅의 틈으로만 새어나온다. 이 생명의 새어나옴, 미세한 열림과 어쩔 수 없는 닫힘은 세계를 그 안으로 (가)둔다. 얼굴은 신체에 ‘부속되는’ 하나의 기관이며, 가시성의 준별됨과 특별함의 차원으로서 부르짖지 않는다. 땅-신체의 전표현적 신체의 유기성과 분간할 수 없음의 얼굴은, 곧 타동적 신체상의 얼굴은, 얼굴의 우월한 가시성의 표식으로서 지위와 뇌의 지배적 차원의 우월한 지위를 거부하고 기각하는 차원으로서 (탈)승화된다.그리고 이 얼굴들은 한 번에 일어남으로써 중앙의 예외적으로 얼굴을 거의 들고 있는 존재―혼자 검은 전신 타이즈를 입은 김만리로, 그의 팔과 얼굴은 직립하여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는 것으로, 곧 평면화되는 것으로 분절된다.―와 일시적으로 동기화되는데, 이 지배적인 얼굴은 이미 분절화가 가능한/성공한 차원의 신체를 표상하며, 또렷한 응시는 지배적이지만 사실, 그 차이를 그 순간의 미래를 응결된 차원으로 보존하고 있는 것과 같다.
타동적 신체는 무게의 차원으로 하강하는 것으로 대체로 나타난다면, 그에 반해 제어되지 못하는 가벼움의 차원으로 반대로 현상되기도 한다. 곧 대열 왼쪽에서 고개는 ‘더’ 처박히지만 왼쪽 다리는 계속해서 위로 솟아나는 어떤 몸이 그러하다. 이때 도무지 그 한쪽 다리는 하강되지 못하며, 지표면을 벗어난다.
집단성은 이 모여 있음 자체보다는 상수에서 하수로 또는 하수에서 상수로 일정하게 굴러갈 때 ‘더’ 발현된다. 일정한 속도와 방향성을 갖는다. 그것은 일정한 틈을 남기면서 그 집단의 형상을 보존하면서 하나의 일관된 의지를 현상한다. 그리고 둘―이케다 하야토, 와타나베 아야노―만 있는 무대에서, 돌기들이 삐죽삐죽 나온, 속은 텅 뚫려 있는 멍게 구조물을 결착함으로써 그 둘은 비로소 앉게 되는데, 지지체로서 그 옷이 상체를 고정시켜줌으로써 상체는 그 옷에 오히려 속박되어 부자연스럽게 펴진 상태를 유지하지만, 하체는 고립되며 이동의 운용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데, 정면을 향해 엎드린 신체들은 드디어 조금 밝아진 조명에 의해 파란색 타이즈 의상으로 식별되며, 오른팔이 거의 없고 작은 왼팔로 상반신을 세워 고개를 든 존재―고이즈미 유스케―는 그 왼팔과 얼굴이 하나의 신체인 것처럼 드러난다. 아마도 조명을 통한 점진적 변화만이 그들의 동일한 반복으로서 유지에 대한 환상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S자 뼈 구조물이 하수 앞쪽 천장에서 서서히 내려온다. 이어 둘씩 짝지어서 한 명이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상호 갈등의 차원보다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다잡으려는 몸짓으로 보이지만 그 역시 원활하지 않다.
신체가 순간 솟구쳐 소리 지르는 이―고이즈미 유스케―의 결정적 장면과 함께 막이 전환되고―여기까지가 1장의 “바다”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며, 가장 길며 무엇보다 땅-생명을 ‘정초’하기 위한 차원에서 그러하다.―, 상수에 하수로 모로 향하는 직사각형 그림자가 생겨난다. 그렇게 뒷모습을 보이며 기어가고 굴러가고 하는 두 개의 이동 양식이 계속 교차되며 끊임없는 행렬을 이루는데, 이때 바람 소리와 함께 존재들의 고투는 더할나위 없이 쓸쓸해 보이며, 무대 절반 정도를 차지하던 그림자는 두 배로 배가되고 길은 확장된다.
이윽고 무대 바깥 객석 옆쪽의 대형 스피커로부터 우레와 빗소리가 강화되며 바람 소리 역시 커진다. 이것의 차이는 극명한데, 그 전까지 소리는 신체 위에 덮이고 있었다면, 이제 재앙은 모두의 것이 된다. 그래서 신체 내재적인/수식적인 바람은 그 신체를 넘어 작용하기 시작하며, 그 수행성은 이격된 실재로 연장된다. 서사는 바깥으로 튀어나온다. 새 소리가 들려오며, 장면이 전환되는데, 이때 피리 소리와 함께 서로 둘러 앉아 있는 존재들이 있다.어렴풋한 형상들 안에서 켁켁거리고 신음 소리도 들리고 하는데, 이는 “육지에서 인류의 출현”을 가리킨다. 그 몸은 고투의 흔적이든 몸의 재배치로 인한 고통이든 간에 ‘덜’ 온전해 보인다. 이때 무대 뒤쪽 중앙부에 가장 길고 큰 화면을 중심으로 양 옆으로 점점 작아지며 대칭되는 방식의 스크린 윤곽이 나타난다. 이때 중앙과 끝 사이에 면적은 각각 동일 비율의 두 개씩의 화면이 위아래로 있는 형국이며, 그렇게 총 일곱 개의 화면에서, 중앙부 화면은 먼저 복잡한 뼈대로 만든 향로 같은 형상 안에 사체나 골수 같은 덩어리가 차 있는 3D 그래픽 이미지가 출현하는데, 일종의 AI의 뇌라고 볼 수 있는 그것은 백인 남성 얼굴로 바뀌며, 감시와 지배의 이미지를 형성한다.

그리고 나머지 여섯 개의 화면은 무대 위를 기록한 영상들이 투여되는데, 무대 위에 떠 있다. 그러니까 신체들은 하강한 얼룩들이며 그 사이는 허공으로 비어 있다. 이때 텅 비어진 허공의 부피가 주는 기이함을 앞선 얼굴의 얇은 부풀어 오른 환영 같은 모습이 채우는데, 그는 이죽거리고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띤다. 그 정서적 감응 없음의 차원보다 사실 더 이상한 건 앞선 몸들이 더할나위 없이 견실하고도 한땀한땀의 치열함이 배어 있다면, 그 얼굴은 무엇보다 ‘시간’이 생략되는, 뛰어넘는 지점에서 (그래픽이라는 익숙한 지점에서) 기이하(며 그것이 부정적인 정서의 차원이 소급되는 결정적 지점이)다―그러니까 영상은 어쩌면 하나의 솔기로서, 투박한 몸의 꿈틀거림이 시간을 두껍게 체적하는 것으로 되돌아오기 위한 부정성의 매개 아닐까.
매우 급격한 변화, 곧 문명에 진입하자 마자 초고도의 기술 문명이 곧장 도입된 것인데―3장의 “지상과 공중의 AI 도시”가 열린 것이다.―, 이때 동시 다발적으로 특정 내부에서 깊어지며 공명되는 노이즈가 지배적이 되는데, 이때 직립한 존재―고이즈미 유스케―의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이때 그 직립은 둘의 호흡으로 이뤄지며 상대의 지지 없이는 불완전하다. 곧 상대가 떠나면서 그는 곧장 나뒹굴게 된다. 그리고 실재의 뼈대는 화면 위로 옮겨지는데, 이를 클로즈업해 가자 그것은 허공 위의 일종의 입체적인 통로를 이루면서 동시에 그 통로는 살과 털, 홈과 주름이 두드러진 표층의 세부로서 드러난다.
그리고 입방체의 일부로 끊임없이 연결되는 기하학적 ‘뼈대’는 중심 없이 무한대로 연장되어 가는, 구조적, 수학적, 추상적 차원의 인공적 신체로서, 이제 신체의 유선형 척추를 치환한다. 그리고 성근 대칭 구조체로서 일종의 향로-뇌는 허공 위에 떠다니면서 또는 회전하면서 한 단면을 드러내는데, 이는 사지를 펼친 부리가 나온 새의 뒷모습이다. 곧 극도로 화려하고 인공적인 디지털 그래픽 이미지는 발광하며 투박하고 경건한 몸들을 대비를 이루기보다 잠식하여 장악하고자 하는 듯 보인다.
이때 집단적 움직임이 바닥에서는 만들어지는데, 뭉쳐서 서로를 올라타고 비좁아진 영토 안에 기식하면서 좁아진 공간은 좁아진 목구멍으로 인한 기침으로 연장되는데, 지배적인 화면의 얼굴은 깜빡이며 일부 네거티브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때 누워서 엄지 발가락을 검지 발가락 위로 꼬아서 허공에서 위아래로 다리 전체를 포인하는 동작―시모무라 마사야의 개성이 초점화되는데, 발레와 달리 발끝은 비틀리고 역동성을 갖게 된다.―이 만들어진다. 이제 스크린에는 뇌-향로의 프레임만 남은 형상인데, 바닥에서 집단 이동의 대열에서는 앉아서 두 발끝으로 기는 또 엎드려 기는 두 명의 하얀 가방을 멘 존재가 눈에 띈다. 또 직립한 존재도 있다.거기서 호리병과 황동 제사 도구, 방울 등을 꺼내 바닥에 일정 면적을 제의 공간으로 삼는다. 그리고 음악 연주로 전화되는데, 팔에 방울을 끼고 흔들거나 보호-연장대를 팔에 끼고 바닥의 캐스터네츠를 치기도 한다. 특히 후자―무카이 노조미―는 사선으로 누워 그것을 하면서 자신을 특징적으로 표지하는데, 그 바닥의 시선이 도구-팔-캐스터네츠의 연속선상을 그리는 지점에서, 관객의 시선이 그 계열로 소급되어 그의 시선을 향하게 되기 때문이다―연주는 악기와 신체와의 연결로 드러나고, 거기에는 악기 내의 분절이 아니라, 시간의 분절이 있다, 오히려 음악은 신체로 소급되어 간다.

이때 직립해서 두 손을 휘저어 박수의 표지를 관객에게 자연 응결시킨 뒤, 일종의 전체로 확장된 연주를 주도하는 존재―이케다 하야토―로 무대가 전이된다. 흙판이 깔리고―이제 마지막 4장으로 이어진다.―, 흙을 묻히는 건 유희와 축제의 한 순간에 가까운데, 더 인상적인 건 막이 내리고, 검은 복면과 의상의 존재들―분라쿠에 등장하는 “쿠로코(黑子)”를 전유해 그렇게 명명된다.―이 이들을 안아 들고 또 지지해서 퇴장하는 장면으로, 이는 한없는 몸의 가벼움, 곧 바닥에 누웠을 때 주름으로 포개져 세부를 만들며 동시에 한없이 무거워지는 그 몸이 접히고 기능하지 않는 덩어리들로서, 그 몸의 본래적 차원을 각인시키며 사라지는 것과 같다.
이는 초반 멍게 의상을 입고 앉을 수 있게 된 그 장면에서, 최초이자 두 번의 등장의 한 번으로 기출현한 바 있는데, 이는 이들이 기어가거나 굴러가는 바닥 접지적 이동의 방식이 실은 자연스러운 것임을 누출한다. 그렇다면 땅을 벗어나 중력을 더 받게 될 때, 또한 신체가 분절되고 구분될 때 그들은 부자연스러운, 비역량적 존재가 ‘더’ 되는 셈이다. 그리고 모두 배를 붙이고 정면을 응시하기 직전에 실은 그 중앙에 자리‘할’ 이는 먼저 등장하는데, 디저리두-구음이 터져 나오고, 장면이 전환되면서 기타 소리와 함께 하이라이트 된 공간에서 홀로 실존하는 형상이 출현한다.
그―김만리―는 비쭉 솟은 비대칭의 두 어깨가 마치 산과 같이 솟아 있다는 감각을 주는 실루엣 그 사이에서 엄격하고도 결연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일종의 자연-인간의 이 존재는, 또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차이를 갖는 이 존재는, 이 시선을 통해 생명의 단초가 정위되는 순간을 상징적으로, 인류의 출발 이전의 기원으로 기입‘하며 각인시킨다―그러니까 이 존재는 인류(를 닮은 존재)의 한 단초이지만, 인류를 초과하는 대타자(를 스스로 명명하고 있는 존재)의 시선이다. 하지만 그것은 서사 바깥으로도 역시 초과되는데, 곧 그냥 하나의 몸인 것으로, 항거와 전복의 시선을 하며, 타이헨 극단 자체의 장애 운동성의 이념 자체를 초과 표상한다.
곧 김만리는 계속 그 불쑥 그리고 우뚝 솟은 몸의 형상과 같이, 고고하고도 딱딱하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형상으로 들여다보게끔 하는데, 그 시선은 마치 나에게 어떤 편견과 오인도 더 더하지 말라라는 경고와 획책의 메시지로 보이는 것이다. 그 정적 이미지는 현실의 이미지이고, 동시에 극단 대표로서 위상차를 드러내는데, 이는 인류의 한 진화적 분기의 내재적 서사를 ‘넘어’ 결국 이 고통스러운 진화의 차원 이전에 머물던 몸들의 성스러움이라는 하나의 메시지가 이 극단의 이념으로 포화되어 가는 지점을 하나의 코드로서 승인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김만리는 여러모로 중간자적인 존재로 자리하며, 그는 극단의 이념대로 그 자신을 변용하지 않고 하나의 자연스러운 이미지 자체로 고정시킨다.
결국 〈브레인〉은 뇌가 얼굴이라는 분리된 신체 지층의 부유함, 한없는 가벼움, 곧 정신 산만함이 고개를 들지 못하는 무거운 신체 전체―“머리를 떼어내지 않은 채”―의 버둥거림의 땅과의 유착, 땅-신체의 바느질-결정적 수행성과 극단적 대비를 이루는 것과 같이, AI가 대체하는 인류의 뇌 역시 그 가상 이미지 안의 거무죽죽한 ‘골수’는 결코 명료화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그 골수의 이미지가 마치 흙의 일부로서 기입되어 재출현하며 비로소 상기됨이 그것과 조응하는바, 곧 마지막 진흙 판 난장은 또한 흙-뇌의 기원적 이미지가 우리의 소급되어야 할 가치의 이미지로 승화되는 장면 아닐까, “모든 것을 뒤집어 다시 하나의 몸으로 만들고 싶다.”라는 김만리의 바람처럼.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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