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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모든 안무, <물속 골리앗>: 공간과 진동하는 움직임REVIEW/Dance 2017. 12. 23. 01:20
▲ (김모든 연출 및 안무, 김애란 원작) 리허설 장면, (사진 좌측부터) 김모든, 김서윤*(본 공연에서는 주하영 무용수가 출연했다), 박명훈 어둠 속 흔들리는 그네로부터 무대는 열린다. 앞에는 방음되는 사운드판이랄까, 거대한 무대 후면의 벽이 펼쳐진다. 이는 시야를 가로막은 사운드 스케이프로서의 공간을 지시한다. 곧 극장이라는 공간 안에 또 다른 공간이 주어지는 셈인데, 뒤쪽 위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향은 이곳을 하나의 공간으로 구획하며 이 안의 존재자들에게 하나의 압력을 선사하는 듯 보인다. 퍼포머들의 움직임은 공간과 길항작용을 거치며 발현되는 듯 보인다. 퍼포머들은 어떤 움직임의 심미화보다는 이 안에서의 분포가 중요하다. 적응과 적응에 대한 표현이 중요하다. 공연은 전반적으로 일상과 다른 시공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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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오넬라의 백조>: 접합과 변용이 만드는 판타지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17. 12. 23. 01:01
▲ (2015), 빌레 왈로 ⓒKyungbok Park [사진 제공=국립현대무용단](이하 상동) 다양한 장면 구성과 빠른 막 전환은 입체적이고 밀도 높은 시간을 제공해 실제의 상연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투여됐을 거라는 인상을 준다. 한마디로 놀랍다. 핀란드 출신의 세계적 작곡가 장 시벨리우스(Jean Sibelius) 탄생 150주년을 맞이해, 핀란드의 컨템퍼러리 서커스 단체인 WHS[비주얼 아티스트이자 마술사 칼레 니오(Kalle Nio), 저글러 빌레 왈로(Ville Walo), 무대 및 의상 디자이너 안느 얌사(Anne Jämsä)에 의해 만들어졌다], 핀란드 베르카테다스(Verkatehdas) 극장, 안성수 픽업그룹(안성수 안무), 예술의전당이 공동으로 제작한 이 작품은, 2015년에 시벨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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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웅 연출, <랭귀지 아카이브>: 언어가 구획하는 사랑의 이름들REVIEW/Theater 2017. 12. 23. 00:25
▲ (성기웅 연출, 줄리아 조 작, 마정화 번역/드라마투르그) 공연 장면, (사진 좌측부터) 배우 이윤재, 안다정 [사진 제공=K아트플래닛](이하 상동) 사라지는 언어를 아카이브 하고자 하는 언어학자 조지(이윤재)와 그를 곧 떠나려는 마리(전수지)의 사랑, 인류의 사라지는 언어인 엘로웨이어를 쓰는 단 두 명, 노부부 레스텐(박상종)과 알타(백현주)의 사랑, 그리고 엠마(안다정)의 조지에 대한 짝사랑, 언어와 사랑이 교착되는 지점을 그리는 듯한 작품은, 처음과 끝에 서사극적 요소를 차용함으로써 관객을 접속시킨다. 막이 오르면, 조지는 혼잣말로 화자가 되어 대사를 전달하며 제4의 벽 바깥에 있는 관객을 가상의 관객으로 상정한다. 조지는 보이지 않는 지문의 내레이션과 대화를 서로 주고받듯 무대에 있으면서 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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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상현, 《플래시메모리-칼(Carl)》: 전시라는 명명이 붙잡아두는 죽음의 명멸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17. 12. 18. 00:04
▲ 하상현 연출, 《플래시메모리-칼(Carl)》 ⓒ하상현(이하 상동) 전시는 말과 함께 시작된다(핸드아웃상의 퍼포먼스 와 는 그제야 실행된다). 그 전에 신촌극장은 입장과 함께 나눠준 두 장의 텍스트(핸드아웃, )와 구석구석 이름 없는 사물들(, , )과 벽에 투사된 영상 을 관객은 더듬더듬 살펴 나간다. 단지 전시를 구성하는 재료/매체들만이 적시/나열된 핸드아웃은, 설치의 (시)공간적 좌표까지 명시(=도면)하지는 않은 채 온전한 전시에 대한 이정표가 되지 못한다. 전시를 구동하는 건 ‘칼’이란 화자로, 프로젝트로 한쪽 벽면에 투사된 문장들로 나타나는 칼에 의해 설치-이미지는 지시되며 텍스트에 함입된다. 텍스트는 사물을 의미로 지칭한다. 전시의 관람객은 텍스트를 통해 사물을 이미지화하고, 의식의 흐름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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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 ‘의미는 삶을 유예하고, 때때로 삶은 의미를 초과한다’REVIEW/Theater 2017. 12. 5. 00:28
▲ (권여선 원작, 박해성 각색/연출), (사진 좌측부터) 배우 신지우, 우정원, 신사랑, 노기용, 황은후 [사진 제공=남산예술센터] 연극의 시작과 함께 튀어나오는 ‘삶의 의미는 없다’는 말은 신은 없다는 말을 의미한다(제목이 수렴하는 지점은 당신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것이 하필 ‘당신’이라는 것이다. 이는 당신‘이’에서 주격 조사의 차이에 기인한다). 사실 이는 신의 존재를 의심하며 신의 부재를 차라리 믿겠다는 유신론자의 좌절로 읽힌다. 삶의 커다란 고통, 죽음의 멍에를 짊어진 인물들, 특히 언니 해언이 돌연 살해된 이후 그 부재를 희미한 기억들로 채우고자 하는 애도 불능의 시기를 겪으며 삶의 의미를 논하는 다언(신사랑 배우)의 물음에서 이는 의존할 데 없는, 긍정할 수 없는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