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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임 안무 <넛크러셔(NUTCRUSHER)>: ‘균열적인’REVIEW/Dance 2019. 3. 12. 13:59
▲ 허성임 안무 공연 사진 한껏 엉덩이를 흔들어대는 것. 이것이 거의 전부라 할 안무는 필시 소진을 향해 가고, 소진의 변증법이라 할 뻗음과 침묵의 영원으로 수렴해 간다. 세 퍼포머는 마치 크로마키 기법을 시현하기 위한 신체 전체를 감싼 의상에서 출발해 하나씩 그것을 벗고 나체화된다. 가린 의상과 더불어 이들은 시종일관 얼굴을 돌리고 있고 따라서 신체의 대상화는 역으로 전도되어 불편한 감각을 맺히게 한다―시선이 지배할 수 있는 건 시선을 돌린 얼굴과 신체 양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지배할 수 있는 신체가 아닌, 기계적으로 프로그래밍된 자체 동력의 신체들이고, 이는 박자를 세는―주로 허성임이 중간에서 그 역할을 전반적으로 가져가는 듯 보인다―행위로써 이 움직임은 반복되어야 한다.이 박자는 이 안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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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극단 신창극 시리즈 3 <시>, 분위기와 표면의 이질적 종합REVIEW/Music 2019. 3. 12. 13:52
▲ 국립창극단 신창극 시리즈 3 공연 사진 [사진 제공=국립극장] (이하 상동)하늘극장의 열어젖힌 구조를 는 고스란히 가져가는 편이다. 블랙박스를 지향하지 않은 무대는 대낮 같은 밝음에 각종 사물들과 인물들을 노출시키는 전략을 펼친다. 시적 대사, 가사라는 것이 제목을 표면적으로 보증해 주는 반면, 실질적으로 그 넷은 어떤 캐릭터를 정의하지 않고 그 내용을 신체적으로 전달해주는 데 그친다는 점에서 일종의 순수한 매체 자체에 가까우며, 이는 다시 네 배우/창자의 실제 인물에 대한 감상으로 수렴된다. 여기서 ‘시’는 그것을 본질적인 것으로 규명하려는 내용이 아니라 네 명의 인물을 대등한 차원에서 분배/분리하는 측면에서의 텅 빈 형식에 가깝다. 따라서 관객이 정작 보는 것은 시적 대사가 만드는 서사가 아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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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하 <Philos> 연주회, ‘사색적 리듬의 흐름들’REVIEW/Music 2019. 3. 12. 13:40
▲ 박지하 정규 2집 음반 [Philos] 발매 쇼케이스 포스터[(1. 24.(목) 오후 8시, 장소: 벨로주 홍대(서교동 372-6)]처음 두 곡은 2015년 ‘박지하 : 자전적 소리의 기록’의 와 두 곡으로, 첫 번째 곡은 지속적으로 솟구치는 방향성을 가진 동적 이미지 배경이 박지하의 신체, 그리고 소리에 대비되며 결합하는데, 박지하의 숨이 뻗어나가며 공간이 구성되고, 소리는 그 자체로 공간에의 현존의 존재로 옮겨감을 보여준다. 두 번째 곡은 생황으로 연주되는 곡인데, 이를 부는 박지하의 신체가 흔들리며 소리가 증폭됨을 매우 가깝게 볼 수 있다(벨로주라는 콘서트장의 규모는 매우 작은 편이다).새 앨범 ‘Philos’의 세 번째 곡 은 바깥의 소리(노이즈 녹음 재생)가 연주가 중첩되는 방식으로, 다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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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빈댄스 <Hidden Dimension>: 어떤 서사로의 출구 전략REVIEW/Dance 2019. 3. 12. 13:35
▲ 유빈댄스 포스터서사는 표면에 있는가 혹은 배면에 있는가. 질문을 바꾸어 본다면 서사는 움직임 이후에 있는가,아님 움직임 이전에 있는가. 서사는 시간을 구성하는 하나의 진행 가이드일까. 아님 움직임을 읽어내는 움직임과 길항 작용을 하는 최소한의 장치일까. 안무가 이나현이 구축하는 즉물적인 몸의 양태는 동적 시간의 마디 속에 이뤄진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시간을 갖는다. 그런 반면 서사는 그 위에 쓰인 간결한 메시지를 구성하기 위한 상징 코드들로부터 성립한다.따라서 이는 움직임들과 직접적인 연관을 맺는 대신 붕 떠서 몸의 충만을 결락으로 보충한다. 곧 이나현은 순간들이 이룬 하나의 덩어리로써 일정한 동시에 일반적인 극무용의 무대 시간을 이루기 위해 하나의 짜임, 곧 50분 이상의 길이, 메시지와 주제를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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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무용단 픽업스테이지 <쓰리 스트라빈스키>: ‘음악으로부터의’ 무게REVIEW/Dance 2019. 3. 12. 13:28
▲ 쓰리 스트라빈스키_김재덕 안무 연습 장면, ⓒAiden Hwang [사진 제공=국립현대무용단] (이하 상동)‘음악에 조응하기로서의 춤’, 세 명의 안무가의 작업은 반드시 이렇게 묶여져야 했을까―거기에 나이(세대) 역순으로. 이는 애초 이 기획 자체에서 음악이 모티브가 됐다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동일자로서 스트라빈스키에 대한 명명은 춤이 언급되지 않는다. 따라서 음악의 최종 구현의 형태로서 춤은 음악에 대한 춤의 강박적 조응을 전제한다. 마치 여기서 음악은 온전히 보존되어야 하는 듯하다―춤을 통한 변환이나 사라짐이 아닌. 춤은 음악(적)으로 번역된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이 보통의 프로시니엄 아치 전후가 아닌 무대 뒤쪽에 배치됨으로써 음악은 희미하게 공간을 침투하려는 가운데, 이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