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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웅 연출, <랭귀지 아카이브>: 언어가 구획하는 사랑의 이름들REVIEW/Theater 2017. 12. 23. 00:25
▲ (성기웅 연출, 줄리아 조 작, 마정화 번역/드라마투르그) 공연 장면, (사진 좌측부터) 배우 이윤재, 안다정 [사진 제공=K아트플래닛](이하 상동) 사라지는 언어를 아카이브 하고자 하는 언어학자 조지(이윤재)와 그를 곧 떠나려는 마리(전수지)의 사랑, 인류의 사라지는 언어인 엘로웨이어를 쓰는 단 두 명, 노부부 레스텐(박상종)과 알타(백현주)의 사랑, 그리고 엠마(안다정)의 조지에 대한 짝사랑, 언어와 사랑이 교착되는 지점을 그리는 듯한 작품은, 처음과 끝에 서사극적 요소를 차용함으로써 관객을 접속시킨다. 막이 오르면, 조지는 혼잣말로 화자가 되어 대사를 전달하며 제4의 벽 바깥에 있는 관객을 가상의 관객으로 상정한다. 조지는 보이지 않는 지문의 내레이션과 대화를 서로 주고받듯 무대에 있으면서 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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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상현, 《플래시메모리-칼(Carl)》: 전시라는 명명이 붙잡아두는 죽음의 명멸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17. 12. 18. 00:04
▲ 하상현 연출, 《플래시메모리-칼(Carl)》 ⓒ하상현(이하 상동) 전시는 말과 함께 시작된다(핸드아웃상의 퍼포먼스 와 는 그제야 실행된다). 그 전에 신촌극장은 입장과 함께 나눠준 두 장의 텍스트(핸드아웃, )와 구석구석 이름 없는 사물들(, , )과 벽에 투사된 영상 을 관객은 더듬더듬 살펴 나간다. 단지 전시를 구성하는 재료/매체들만이 적시/나열된 핸드아웃은, 설치의 (시)공간적 좌표까지 명시(=도면)하지는 않은 채 온전한 전시에 대한 이정표가 되지 못한다. 전시를 구동하는 건 ‘칼’이란 화자로, 프로젝트로 한쪽 벽면에 투사된 문장들로 나타나는 칼에 의해 설치-이미지는 지시되며 텍스트에 함입된다. 텍스트는 사물을 의미로 지칭한다. 전시의 관람객은 텍스트를 통해 사물을 이미지화하고, 의식의 흐름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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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 ‘의미는 삶을 유예하고, 때때로 삶은 의미를 초과한다’REVIEW/Theater 2017. 12. 5. 00:28
▲ (권여선 원작, 박해성 각색/연출), (사진 좌측부터) 배우 신지우, 우정원, 신사랑, 노기용, 황은후 [사진 제공=남산예술센터] 연극의 시작과 함께 튀어나오는 ‘삶의 의미는 없다’는 말은 신은 없다는 말을 의미한다(제목이 수렴하는 지점은 당신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것이 하필 ‘당신’이라는 것이다. 이는 당신‘이’에서 주격 조사의 차이에 기인한다). 사실 이는 신의 존재를 의심하며 신의 부재를 차라리 믿겠다는 유신론자의 좌절로 읽힌다. 삶의 커다란 고통, 죽음의 멍에를 짊어진 인물들, 특히 언니 해언이 돌연 살해된 이후 그 부재를 희미한 기억들로 채우고자 하는 애도 불능의 시기를 겪으며 삶의 의미를 논하는 다언(신사랑 배우)의 물음에서 이는 의존할 데 없는, 긍정할 수 없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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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스트 씨어리, 《당신이 시작하라》: ‘관객의 탄생’REVIEW/Visual arts 2017. 12. 5. 00:05
▲ , 2015, 싱글 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시간 45분 ⓒPatrica Marcoccia and Oscar Tosso [사진 제공=백남준아트센터] (2015)는 연속되는 하나의 쇼트 안에 한 명씩 연결해 도시를 걷는 일곱 명의 사람을 다룬다. 동시에 이는 온라인과 극장에 실시간 스트리밍되었었다. “당신이 바꾸었으면 하지만 바꿀 수 없는 건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이 일곱 명을 관통하고, 일곱 명을 향한 질문은 다른 답을 도출한다, 아니 질문은 다른 세계로의 접속을 요청하는 질문으로 환원된다. ▲ , 2009, 싱글 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5분 ⓒAnne Brassier [사진 제공=백남준아트센터] (2009)에서 전화를 받은 관객이 율리케와 아이몬 중 한 명을 선택하고 도시 곳곳을 걷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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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성 작/연출, <비명자2>: ‘사회적 의제의 직접적 반영’REVIEW/Theater 2017. 11. 28. 23:25
▲ (작/연출 이해성) [사진 제공=극단 고래] (이하 상동) ‘(소수의) 타인의 한정할 수 없는 고통은 결국 사회적 고통으로 전이된다’는 작업의 교훈은, 타인의 고통을 사회적 고통으로 체감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측정할 수 없는 고통으로 정의되(지 않)는 그들의 고통은 결국 소통이 불가능한 비언어의 양적 크기로 측정되며(‘반경 4km까지 물리적 영향을 끼치는’) 동시에 이해 불가능한 이해로, 말할 수 없는 우리 자신으로 수렴된다. 곧 이 작업에서 ‘타자의 고통은 우리의 고통이다’라는 명제와 ‘타자의 고통은 절대적인 것이다’라는 명제는, 그런 ‘타자의 고통을 우리가 이해할 수는 없어도 공감할 수는 있다’는 명제를 더하며,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나아가게 된다. 우리는 비명을 끊임없이 지르는 끊임없이 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