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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남김 <런닝머신>: 잉여로서의 재잘거림과 무의식의 몸체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13. 10. 11. 12:52
▲ 프로젝트 남김 포스터 [=프로젝트 남김 제공] 어둡고 음습한 듯한 외피, 그럼에도 입구에서부터 확장‧개방되는 시야와 카운터가 주는 안락함까지 지하의 콘크리트 공간은 화이트박스의 부정형으로만은 느껴지지 않는 구석이 있다(말하자면 탈제도적인 공간으로서). 갤러리 정다방 프로젝트라는 이름은 마치 이곳을 다방으로 이질적으로 전유하는 차원을 넘어 ‘정’ 씨란 누군가의 은근한 기획의 풍모를 느끼게 하는 측면이 있다. 곧 기실 장소는 한 군데이지만, ‘새끼치기’를 한 것 같은 느낌을 주며 가상의 여러 공간들을 상상하게 하는 것. 이곳에서 벌어진 ‘프로젝트 남김(Project Namkim)’의 이름 역시 뭔가 오역과 오해의 여지를 많이 두고 있는데, 영어로는 남 킴으로 발음하게 되며(될 여지가 있으며) 우리말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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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의 전유,《근성과 협동(GUTS AND COOPERATION)》REVIEW/Visual arts 2013. 9. 29. 04:55
▲ 홍은주, 김형재, , 2013. 옵셋 프린트, 15 x 21 cm. 엽서 이미지. 오래된/허름한 역사적/시차적 환경, 번쩍거리는 조명들의 오브제들을 지나, ‘좁고 높은 유격’의 콘트리트 계단을 밟아 스튜디오에 입성하면, 책들로 둘러싸인, 컴퓨터 환경의 사무실임을 깨닫게 된다. 전시는 이 ‘스튜디오’의 일시적인 전유로서, 김실비의 작업은 이 ‘홍은주 김형재 스튜디오’ 안에 하나의 모니터 안 뮤직비디오 형식의 영상으로 소환된다. 이는 중앙에 있으며, 우리가 컴퓨터 앞에 앉을 때 하나의 내밀한 개인적 공간의 장을 곧장 형성하듯 좁은 공간의 낯섦, (가령 오프닝의 들락날락하는 열린 분위기가 아닌 이상) 평상시 작업하고 있을 스튜디오 주인들과 데면데면한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는 이 공간이 갖는 분위기,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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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알리바이 연대기>: '과거를 현재로 깁는 경험적/서사적 시선'REVIEW/Theater 2013. 9. 28. 00:46
▲ 연극 [사진 제공=국립극단] (이하 상동) 는 아버지와 아들의 시차적 삶의 재현을 한국 근현대사의 연대기의 큰 흐름으로 두는 가운데, 회상으로써 순간적인 에피소드들로 과거와 단절된 일상의 영속된 시간 안에 과거로부터 현재를 다시 깁는다. 이 회상의 형태가 현재에 머물러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 과거의 현전으로 나타나며 이는 현재를 재구성하게 된다. 마치 시간 여행을 떠나 과거를 현재의 시점에서 체험하며 혼합된 시간을 경험하는 역사 탐험의 교과서적 만화를 보는 것 같은 매체의 전이가 느껴진다. 이러한, 과거를 재현하는 이야기 형식‧현전의 양태‧혼합된 시간으로서의 측면은 를 그야말로 현재와의 연대를 맺는, 현재로부터 출발한 나아가 과거까지를 다루는 연대기가 되게끔 한다. 박정희와 동시대를 산 김재엽 연출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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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에 관한 첫 번째 주석카테고리 없음 2013. 9. 28. 00:15
▲ 영화 의 공식 포스터 ⓒ 나우필름(주), 파인하우스필름(주) 영화의 가쁜 호흡에 숨죽인 채 영화를 봤다. 두 시간이 넘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영화에 대한 후속 반응은 대체로 여진구에 대한 격찬과 주제에 대한 모호함에 대한 토로 즉 삐걱거리는 내지는 너무 많은 것이 담겨 있다는 비판의 날이 담긴 의견 정도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전자는 여진구란 배우에 대한 순전한 몫을 의미하는 대신 당연하게도 영화의 무게가 여진구가 맡은 화이란 역에 쏠려 있음을 반증하는 것일 테고, 후자는 이 영화의 구조적 완성도를 논하기 전에 영화가 다루는 주제가 실상 그리 만만치만은 않음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두 개의 반응 혹 물음은 화이로부터 출발하며 화이로 귀결된다.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우리는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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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즉흥상설-고수푸리 '몸의 대화': '즉흥', 춤이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자리REVIEW/Dance 2013. 9. 26. 14:57
즉흥은 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것으로만 두기에는 다소 부족해 보인다. 춤이 생성되는 순간 춤으로써 춤에서 미끄러지며 또 다른 춤으로써 춤이 되려는 시차적이고 불가능한 시도가 즉흥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는 다시 춤, 춤의 현전이 아닐까. 춤은 상대방을 의식한다. 그리고 그 몸에, 춤의 틈에, 춤의 드넓은 장에 들어가기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다. 아니 먼저 춤을 시작한 이로서는 상대방이 우발적으로 들어오기를 동시에 안정적으로 안착하기를 바라며 틈을 벌리고 있다. 이런 절대적인 타자성과 조심스러움, 그리고 쫓고 쫓김으로 나타나는 이후 양상은 곧장 춤이 되지 않는 끊임없이 간극을 벌리는 시차에 다름 아니다. 유빈 댄스, 그리고 이나현의 춤이 갖는 실체적, 질료적 측면이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