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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리 린 작, 진해정 연출, 〈너울〉: 삶에 대한 진정한 선택에 대하여REVIEW/Theater 2026. 5. 31. 13:30
너울거리는 관계들

아일리 린 작, 진해정 연출, 배서현 번역,〈너울〉ⓒ이지수 [사진 제공=페미씨어터](이하 상동). 〈너울〉은 28년 전 벨과 아나이스, 플로 셋이 만난 순간 이후의 역사가 현재와 교차하여 진행되며 따라서 극은 그 사이에서의 툭 끊긴 과거를 앞뒤로 복원하기 위한 과정이기도 한데, 곧 과거가 어떻게 현재의 발단이 되었으며, 현재는 어떻게 과거로써 영속화된 순간을 맞았는지를 인지하는 것과 같다. 무대 전체에 편재된 네 개의 테이블과 그 곁의 의자들은 일종의 ‘통로’로서 무대를 구성하는데, 어둠과 구음의 음악에 감싸이는 막 전환의 순간에 이는 현격화된다. 그리고 인물들은 이때 그림자처럼 너울거리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의 총체적 형상, 곧 상호 연루적 비접촉의 차원의 어른거림 아래 그러하다.
기억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고 또한 진실의 흔적으로서 유출되고 있는데, 〈너울〉은 바로 이 이점에서 움직임으로서, 일정한 가로지름의 안무로서 기억의 비실체적 실재성을 관념화한다. 그리고 그것의 구체성은 인연들의 헤어짐과 시차, 간극 같은 것들이다. 중앙부로 이들―전체 출연진―이 한데 모여 엉키는 순간, 전화벨이 울리고, 형상은 해체된다. 곧 B(윤현길)와 F(김광덕)의 대화, 28년 후의 현실이 펼쳐진다. 이 전화는 불길하고도 F에게는 감춰야 하는 진실이다. 어떻게 보면 간략화된 자막은 이들의 사실보다 더 진실한데, 28년 전으로 돌아갔을 때 벨과 플로로 ‘더’ 풍부하게 이름을 담고 있다는 것은 무언가 분명하게 의미심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너울〉 안에 퀴어라는 인물들과 그 관계가 담기지만, 실은 〈너울〉이 말하는 건 보편타당한 차원에서 꽤 명확하다. 그것은 뇌의 특정 부분을 경유해 실은 우리의 무의식의 한 단면을 해부하는 것과 같은데, 가령 지젝이 이야기한 것처럼 안면 인식 장애가 있어 특정 사람만을 인식하지 못할 때 그런데 그것이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사람일 때 그것은 과학적 진리에서 무의식의 진실 차원의 견지에서 생각될 수 있다는 것에 상응한다.
그러니까 극의 결정적 스포일러로 감겨 있지만, 실은 그것이 결말로서 모든 걸 전복시킨다고 해도, 중요한 건 그것이 사랑의 어떤 중핵에 다가서며 그것을 질문하고 있다는 차원의 견지에서 이 작품을 끝없이 증대시킬 뿐 도리어 감축시키는 건 절대 아니라는 사실이다. 결국 결말은 진실의 단서 획득으로 인한 해소가 아니라, 진실 이후에 삶이 어떻게 수용될 수 있는지를 향한다―그러니까 오히려 그 결말을 알고 이 극의 본질로부터 출발하는 것도 나쁜 선택이 아니다.
무의식적 차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원형적 사랑의 기억을 안고 있고, 그렇다면 그 이후의 사랑이 가령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는데, 가령 그 이후에 우리의 사랑이 더 충실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이후의 존재가 어떻게 자족적 차원의 전적인 새로움이 아니라, 그것의 반복으로서 불완전한 대체제일 수밖에 없는지를 거꾸로 알려주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그 원형적 존재를 벗어나기 위해 또는 은폐하기 위해 또는 스스로 속기 위해 또는 그것의 극복의 차원에서 지금의 사랑을 우리는 지속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과연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인물들의 무의식
뇌졸증으로 인한 벨(이은조)의 아나이스(장샘이)에 대한 플로의 혼동은 바로 그 결정적인 순간이었었지만, 진짜 중요한 건 이 혼동이 진정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결정된다일 것이다. 벨(윤현길)은 진정 아나이스(김광덕)를 사랑했다라는 것, 그것은 불가능하지만, ‘의도된’ 굴절 혹은 반전으로써 가능하다. 곧 반아나이스의 연장선상에서 플로를 아나이스 대신 받아들임으로써 아나이스를 영구히 상실된 대상의 그리움으로서 보존하고 있었으며, 그렇게 네가 진정 사랑한 건 눈앞의 플로가 아니라 ‘플로를 가장한’ 아나이스라는 것이 마침내 아나이스가 아닌 ‘플로’에게 도착함으로써 플로가 아닌 아나이스의 사랑은 결실을 맺는다. 그건 가장 황홀하지만 가장 가혹한 속임수이다.
이는 아나이스로써 플로의 자리를 대체함이 은폐되었었다는 사실 자체를 그가 알고 있었음을, 아니 그가 직접 플로로써 아나이스를 은폐하고 있었음을 누출한다, 무의식적으로. 이는 냉혹하고도 악랄한데, 자신을 물리적으로도 그리고 정체성 차원에서도 완전히 포기하고서라도 플로를 지켜내었던 아나이스의 의지가 뒤늦게 도착한 플로(이미라)에 의해 사랑이라는 착각과 비윤리적인 판단이라고 자기 심문 될 때 비로소 그를 구원하며 합목적적인 차원으로 격상시키기 때문이다. 애초에 벨(이은조)은 ‘둘’ 만의 사랑을 꿈꾸었다. 그것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조건인 셈인데, 아나이스(박은호)는 그의 엄마와 가족이 결혼이라는 제도 아래에서 벨을 묶고 그를 공개적으로 아웃팅시키는 위험과 불안이 그 직전에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반면, 플로(장샘이)는 어딘가로 떠돌아다니는 삶, 서핑을 실제 즐기며 그것이 체화된 삶을 살던 이였고, 거기에는 경계가 표지되지 않는, 벨 자신이 더 알려지지 않을 수 있는,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도피와 은폐가 가능한 장소에서의 만남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곧 플로와 벨의 사랑은 직접적이지 않으며, 어떤 증거나 구체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곧 플로는 반아나이스의 차원에서만 중요성을, 차이를, 가치를 획득한다. 아나이스의 반정립은 플로이스이지만, 그 반대는 아니다.
아나이스와 플로는 대립하며, 벨과의 관계 맺음으로 인해 동등하게 중요한 존재가 된다. 그러니까 적어도 벨의 관점에서는 플로의 저편에는 아나이스가 있고, 그 반대 역시 성립한다. 이는 두 사람이 회전하면서 그의 의식 세계 일부를 구성함을 의미하고 그것이 내재적이고 물리적으로 체현된 것이 바로 그가 병을 앓고 난 이후이다. 따라서 어쩌면 그가 일부를 잃어버려야만 아니 망각해야만 그는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 아닐까. 그렇지만 플로에 대한 사랑의 눈 멂이 아나이스를 플로로서 만드는 것을 ‘뒤늦게’ 그리하여 적절한 순간에 뒤집는 건, 아나이스에 대한 사랑을 ‘플로’ 앞에서 고백하는 것이 되며, 이 굴절된 사랑의 차원에서, 아나이스에 대한 그 사랑은 진정한 것이 된다.
무의식이 가장한 것
동시에 이는 전도되는데, 벨(윤현길)이 벨을 위해 아나이스에게 희생하지 않은 ‘성실하지 않은’ 판본의 플로가 치러야 할 대가를 아나이스(김광덕) 저편의 플로에게 전해주고 있는 가운데, 아나이스의 숭고함을 ‘더’ 격상시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자신이 아나이스를 플로로 착각하고 있었음을 연기하고 있었음을 실토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무의식적 차원에서라도. 아나이스의 숭고한 행위로 인해 이제 그 플로에 대한 강렬한 매혹보다 더 소중한 사랑의 차원을 깨닫게 되었음으로 사랑은 굴절된다. 그러니까 매혹과 희생 모두를 수행한 플로가 최종 승자가 됨으로써, 실제 사랑했던, 그리고 사랑받지 못함에도 기꺼이 사랑하고자 했던 것까지 희생의 영역에 포함시켰던 아나이스에게 미처 그 고마움과 성찬을 다 보낼 수 없음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이때 벨은 사실 플로에 대한 지난 매혹이 진정한 것이었음을 은밀하게 고백하는 건 아닐까. 그러니까 아나이스가 아닌 플로를 진정 사랑했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곧 그가 도망가 버렸기에, 그리고 그 사실을 아나이스가 “정확하게” 전한다고 했기에, 아마도 이에 대해서는 극은 결코 들려주지 않음으로써 그 사실 여부가 지금에서야 뒤늦게 명확(하게 중요)해지는데, 어쨌거나 벨은 플로의 대체재로서 벨에게서 사랑받고자 한 아나이스를 플로가 아닌 아나이스로서 사랑‘하고자’ 했던 것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이제 더 이상 ‘플로’를 사랑하는 행위, 곧 플로라고 착각하고서 아나이스를 대신 사랑하는 그 행위 자체를 연기의 연장선상에서 비로소 규정함으로써, 곧 플로(이미라)인 줄 알지만 담담하게 그를 반쯤만 마주하는 것 안에서 그를 사실은 부인하는 것으로써 (그 앎을 모름으로 전화하는 가운데) ‘둘’의 현실 안에서 플로를 떠나보낸 것 아닐까―그 부정성을 오직 아나이스만이 보게 된다.
곧 그가 실제 그 만남을 진정 두려워했던 아나이스에게 그 셋의 두 번째 만남이 결국 성사되었을 때, 플로를 모르는 이, 어렴풋한 기억의 과거 존재로서 떠나보내는 장면을 그가 상연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애초에 (사후적으로 명료화되는) 플로에게서의 그 전화를 아나이스가 스팸이라고 둘러댔을 때 벨은 이미 그것이 플로(라는 것과 그)에 대한 아나이스의 두려움인지를 알고 있었던 것 아닐까. 곧 벨은 아나이스를 진정 둘만의 결혼으로 붙잡아 두는 방식을 ‘무의식적으로나마’ 고안해 냈던 건 아닐까. 그것이 곧 반만 보는, 실은 반만을 선택한 벨의 신체성에 대한 실질 아닐까. 대립되는, 대비되는 둘을 모두 갖는 방식, 그러나 진정한 한 명만을 갖는 방식으로서 말이다.
그러니까 벨에게 아나이스는 처음부터 영속적으로 아나이스였으며, 플로 역시 그에게는 그러했던 것 아닐까. 플로라는 서핑적 존재를 경유해 결국 벨은 아나이스로부터 도망가며 아나이스를 플로로서 정착시킨다. 그것은 플로의 영원한 떠돎에 대한 부정성을 환상화하는 방법이며, 또한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돌봄적 존재, 혹은 강박적 존재인 아나이스―반대로 플로는 히스테리적 존재인 셈이다.―로부터 자신을 취약한 대상으로, 그리고 자신을 소유할 수 있는 방식의 한 경로로서 두며, 그를 그의 단단한 세계로부터 고립시키는 방식 말이다.
어쩌면 그가 아나이스에 대해 플로로서의 고마움을 전하는 건 그가 자신을 물리적으로 돌봐주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진정한 희생자로서 그러했기 때문이다, 곧 자신에게 온전히 속았기 때문이다. 반면, 이는 플로를 진정 경유하는데, 플로라면 그러지 못했을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나이스에 대한 사랑은 다시 플로의 비돌봄적, 자유를 앞세운, 숭고하지 않은 즉흥적인 사랑의 강렬함 대신에 그 반대의 사랑이 마침내 도달한 결실, 곧 오로지 비프로적인 것의 아나이스인 것인 것이다.
따라서 아나이스가 아닌 플로를 가짜로 선택했던 게 아니라 플로가 아닌 아나이스를 진짜로 선택했음이 드러나고, 그 숭고한 행위를 사랑의 차원과 대별 짓는 가운데, 다시 아나이스가 아닌 플로의 돌봄을 사랑으로 격상시키는 건 그것이 실은 사랑임을 뒤늦게 깨닫는, 그리고 공준하는 언어인 셈이다. 곧 진정한 사랑의 대상이 있었고, 거기에 사랑이 ‘영속적인’ 차원으로 수반될 때 그 존재는 비로소 사랑의 이름 아래, 완성되는 것이다. 그것은 아나이스가 진정한 대상임을 벨이 한 번 되돌려 정의하고, 다시 아나이스 스스로 그 결실을 자신의 몫으로 수여하는 가운데 성립한다. 이제 그 플로는 진정한 아나이스의 몫을 행했기 때문에 아나이스로 명명되었다.
그렇게 아나이스는 플로라는 환상을 스스로 벗을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균열이 있지 않을까. 시간을, 존재를 돌이킬 수 없지만, 아나이스는 스스로 플로임을 포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 벨(이은조)은 28년 전 셋이 간 무도회장에서 아나이스(박은호)가 아닌 플로(장샘이)의 애무에, 곧 둘이 껴안고 있을 때 난입해 아나이스를 중간에 두고 자신에게 닿는 플로의 손짓에 정신을 잃는다. 이 첫 번째 결정적 패닉 상태, “공황 발작”의 상태는 곧 플로라는 실재의 매혹에 대한 것 아니었을까. 그것은 플로의 불경한 혹은 깜찍한 그 행위를 언급하지 않고서 곧 직접적 원인을 돌리지 않고서 성립한다.
매혹과 애착 사이에서
그리고 이는 벨의 심연을, 중핵의 트라우마를 드러낸다. 그것은 타동적으로 바닷속이며 숨 쉬는 것이 매우 고통스럽다. 이때 그의 곁에 머물며 어떤 당황도 없이 그를 어르고 숨을 안정화시켜 주던 건 아나이스로 그 둘을 바깥, 하수 쪽 출입문 쪽에서 보고 있던 건 플로이다. 플로는 어찌할 바 모르지만, 중요한 건 곤궁에 처한 이와 그를 보호하던 이 둘만의 관계이다. 꽤 긴, 거의 리얼타임으로 육박하는 이 구조 장면은 이후 28년의 시간 동안 반복되어 상연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나는 두 번째, 벨의 최후의 쓰러짐 이후 그 돌봄을 하지 못하겠다는 플로는 도피한 것이 아니라, 아나이스의 몫을 승인한 것 아닐까. 그의 도피는 한편으로는 그답지 않다, 그의 돌봄의 장면은 어떤 모험의 시간을 거역하지만 실은 그 결정적인 모험의 순간이기도 한 것이다, 그가 그 둘을 떠나는 대신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플로(이미라)는 다시 나타나 그 진실을 알았을 때 곧 벨이 아나이스를 플로로 불렀던 걸 가지고 아나이스(김광덕)에게 분노와 비판을 쏟아낸다.
그것은 자신의 환상성을 빼앗겼다는 지점 때문이며, 자신에게는 28년 이후에 여전히 혼자임을 자각하는 차원에서 또한 그러하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매력적인 존재이며 그 매력적인 존재임을 재승인받고자 하는 존재로서 결정되는데, 이는 벨 이전에, 아나이스를 향해 한 번, 그리고 벨(윤현길)을 직접 마주하는 것으로써 한 번 그러하다. 하지만 그 역시 진정한 사랑을 연장시키고자 하며, 거기서 모종의 단서, “합창단”을 듣기는 하지만, 곧 그것이 덧없음을, 그리고 이전에 그가 승인한 것처럼 그는 그러지 못했을 것임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초반 아나이스(박은호)가 벨(이은조)에게 플로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의 매력이 상대를 감화시키는 것에 대해 “개미 곰팡이”가 개미 뇌를 조작해서 “꼭두각시”로 만드는 것으로 비유하는데, 아마도 이는 무엇보다 자기 운명에 대한 예언으로서 의미심장하지 않을까―전자가 벨이라면 후자는 아나이스이다. 물론 그에 앞서, 벨이 플로에게 매혹당함의 결말을 예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벨의 일부 작동하지 않은 뇌가 플로에 대한 강렬한 사랑을 중단시킴에 대한 방어 기제인 동시에 아나이스의 강건함과 분노에 대한 방어 기제를 동시에 성립시키는 것과 같이 어떤 벨의 무의식적 효과로서 굴절되어 더 복잡하고 정교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에서 더 적확하게 드러나는 것 아닐까―전자가 벨의 무의식이라면 후자는 벨의 신체적 증상이 된다.
그러니까 벨의 증상은 플로라는 매혹과 아나이스라는 애착이 결합된 존재를 획득한다. 동시에 플로와의 영속적인 사랑과 아나이스와의 단 둘만의 안정적 사랑 모두를 복합적으로 결합하여, 전자는 판타지로서 후자는 현실로서 성취한다. 그런데 벨의 진정한 사랑의 감정은 무엇일까. 〈너울〉은 플로와 벨 사이에서의 아나이스, 그리고 벨과 아나이스 사이에서의 플로를 각각 보여주며, 그 둘 모두 벨을 사랑하는 데 있어 갈등하고 번민하는 주체의 관점을 묘사한다. 반면, 벨만은 그렇지 않은데, 그의 그러함이 나타나는 건 마지막 ‘착란’ 상태에서의 여전한 혼동들이 보여주는 진실의 장면에서다. 곧 그 역시도 아니 그야말로 진정 둘 사이에서 영원히 고민하고 갈등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나이스는 아웃팅을 하고 어찌 됐건 사회적으로 견실하게 살아가지만, 벨은 가족에게 이를 수용받지 못했으며, 그 결과 가족과 단절되어 있고, 그로부터 심연의 바다에 고립되어 있음의 은유가 실제 체현된다. 그러니까 이 절대적 증상이 보여주는 건, 그 신체-심리적 차원의 해소 불가능성이 보여주는 건, 퀴어가 갖는 취약함이 사회적 제도와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로 인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는 그것을 다루(고 비판하며 어떤 틈을 찾아내)는 대신에, 그리고 그 바로 옆, 아나이스의 경우처럼 극복할 수 있는 사례를 제시함에도, 그것을 자기 모순적으로 절대적인 중압감을 주는 환상물로서 상정해 버린다는 것이다.
퀴어로부터 혹은 퀴어를 경유해
〈너울〉은 결국 사랑스러운 세 명의 존재가 세 명의 공존으로서 사랑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지점에서 그 실존적 양상 하나하나가 비극의 수면 위로 오르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여기서 아웃팅과 사회 관습적 제도의 차원은 사실상 그들의 내속적 현실로서 드러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외부적인 것으로만 남아 있기도 하다. 그러니까 벨의 장애, 실은 기억 상실의 증세는 퀴어의 사랑이 비사회적인 고립 속에서만 완전하게 성취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일종의 도피성 판타지 같은 것 아닐까, 곧 플로~아나이스에 대한 도피가 아니라 퀴어를 온전하게 용인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도피 말이다. 그리고 이는 물론 벨의 무의식이 아니라 극 자체의 무의식 아닐까1.
〈너울〉에는 몇 번의 “퀴어” 자체에 대한 지시가 나타나는데, 이는 아나이스가 벨에게 느꼈던 감정, 너 때문에 심장이 “너울거려.”라고 했던 고백이자 청혼의 말을 아나이스가 플로에게 다시 전했을 때 플로가 ‘자신이 들어본 말 중에 가장 퀴어하다’라고 답변하는 부분은 매우 명확하게 그러한 부분이다. 이는 퀴어라는 용어 자체가 그들 사이에서는 외부의 기준이 매개된 시점, 곧 외부에서 자신을 지칭하고 가늠하는 경계적 단어로서 사용함을 좀 작위적이고 비일상적 차원에서 쓰이는 것을 거꾸로 드러낸다. 또한 동시에 “너울”이라는 말이 독특하고 특별하며 예외적인 한편, 그것이 퀴어성을 새로운 문학적 차원으로 데려다 준다는 어떤 형용 불가능한 차원에 대한 수식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너울’은 사랑에 대한 특별한 문학적 작업이면서 동시에 일상을 넘어서는 문학적 표현으로서 일종의 경계의 전이 지대에 다다르는 언어로서 그것이 곧 퀴어로 직유되면서, 퀴어의 예외성과 특별함 자체를 (문학이라는 승화된 자리에서) 보편적으로 다시 전유한다―곧 문학으로서 퀴어와 퀴어로서 문학의 차원을 횡단한다. ‘너울’은 앞서 말했듯 존재 자체의 환영성뿐만 아니라 존재와 존재 사이의 묘연한 정서, 휘말림, 나아가 측정할 수 없는 기나긴 시간의 파고 등등을 중간 중간의 스쳐지나가는 이행 속에서 명료하게 표현한다.
‘너울’은 또한 바다의 움직임을 환유하는 관념이기도 하다. 플로의 서핑 커뮤니티에 대한 이야기 중에 바다는 ‘너울이 있는 곳’으로 비유되는데,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사회에 비견한 이 “커뮤니티”라는 말에 동반해 다시 “퀴어”가 등장한다. 어쩌면 이 대화는 벨의 결정적, 영속화된 시간에 대한 그 결정적 선택을 예기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곧 벨에게는 그들 안의 온전하고 자족적인 시간이 달성되는 장소로서 커뮤니티라는 관념이 의미화되며, 마침내 플로~아나이스와 단 둘이서 커뮤니티를 이루어 그 이상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주체란
벨(윤현길)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주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듯 보인다. 그것은 모호하고도 잠재적이다. 그의 플로와 아나이스를 오가는 착란 자체가 일종의 너울거림이다. 그 전까지 벨은 아나이스에게는 아나이스가 플로를 비유하면서 든 “강아지”에 해당하며, 특히 클럽에서 벨(이은조)의 춤은 전형적인 연극 안의 양식적 움직임과는 다른, 생기 넘치고 유연한 춤 자체인데, 이는 곧이어 발작 상태로 전화한다. 그리고 안정적인 아나이스(박은호)의 조처에 의해 그것은 긴급하지만 실은 안정적인 차원으로 강제로 보이게 된다. 그리고 이는 거의 벨에 대한 절대적 매력으로 각인된다.
벨(윤현길)은 28년 뒤의 플로(이미라)와 마주하며 “다른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살아감을 “피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사회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그를 숨 막히게 하는 환경의 힘으로부터 그는 플로에서처럼 그것으로부터 유연하게 된 것일까. 그 사회로부터 고립된 커뮤니티의 차원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말이다. 플로의 자유로움과 유연함이 커뮤니티의 안온함과 연결되어 벨에게 전해졌을 때 상상적 바다로서 세계를 그는 유영할 수 있게 되었던 것 아닐까.
그러니까 비로소 서핑이 세계를 살아가는 것의 지혜로 재정의되는 그 순간이 출현할 때, 비로소 벨은 플로가 주었던 선물 같은 말에 대해 뒤늦게 대답을 돌려주며, 곧 플로의 말에 서핑하여 ‘플로’가 플로임을 되돌려주며, 플로의 벨에 대한 사랑의 기대에 맞서 플로로서 아나이스를 착각하고 있었음이 아니라 은폐로써 아나이스를 마주하고 있었음을 누출하며 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있는 것 아니었을까. 지금 아나이스와의 삶이 너의 그 삶과 같이, 그 서핑 커뮤니티의 실천적 삶이자 더는 나에게 있어서도 공포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활력과 진정한 기쁨으로서 바다임을 규정하면서 말이다.
김민관 편집장2026.5.8(금)~2026.5.17(일) 수,목,금요일 20:00 / 토요일 15:00, 19:00 / 일요일 15:00 (월,화 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출연진 및 제작진 소개
[Cast]
김광덕, 윤현길, 이미라, 장샘이, 이은조, 박은호
[Writer]
Isley Lynn(they/them)
[함께 만드는 사람들]
번역 배서현
연출 진해정
조연출 배규진
무대 송지인
음악·음향 지미 세르
조명 신동선
움직임 손지민
한글자막해설 디자인 임민정
한글자막해설 OP 이예본
음향OP 김민아
그래픽 황가림
공연사진 이지수
기록영상 강수연
기획운영 나희경, 이도원
주최·주관 배서현
라이선스 The Agency (London) Ltd
제작협력 프로젝트 이어, 페미씨어터
접근성 운영협력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
후원 서울문화재단
문의
카카오톡 채널│페미씨어터_플레이포라이프
전화│010-2069-7202
- 1. 이는 문화적 차이에서, 물론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이 작품의 문화적 차이를 감안하지 않고 작품에 대해 단정 지으면 안 된다라는 말도 되지만, 동시에 한국적 맥락 아래에서 〈너울〉이 어떻게 읽히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곧 벨의 (무의식적) ‘선택’이 해당 국가의 경우, 어쩌면 그냥 자연스러운 한 다양성의 범주로서 용인될 수도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뭔가 한국적 상황에서 퀴어의 이른바 아웃팅 불모지, 척박한 퀴어의 존재론적 환경 자체로부터, 곧 구조적 차원에 대한 비판과 대안의 한 지점으로서 주요하게 자리하는 예술의 반동적이고 대안적인 운동의 역사 그 흐름 아래에서 결국 〈너울〉‘의’ 선택이 아니라 〈너울〉‘이라는’ 선택의 차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 속에서 벨의 선택은 결정적인 사랑에 대한 진실을 말하(는 지점에서 너무나 탁월한 장면이)면서도 동시에 사회 구조적 차원의 비매개성을 판타지로 기입하고 있는 작업(으로서 비판될 수 있는 것) 아닐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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