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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왕성에서>: 책임질 수 없는 판타지!REVIEW/Theater 2019. 6. 20. 21:41
▲ (작,연출 박상현) 포스터 는 세월호 당시를 정리하고 죽은 자의 목소리를 재현하는 차원에서 징후적이다. 이제는 그것을 거리를 갖고 볼 수 있는 시점에 이른 것일까. 결론에 이르러 ‘명왕성’은 그 죽은 자들의 발신지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로부터 그들의 안부가 전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애도 불가능성’이 소실되어 가는 작품은 그 자체로 비정치적이며 무지의 판타지를 구현하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의문을 안긴다. 그러한 판타지를 통해 이 작업은 신파에 도달한다. 저 작업을 보며 울고 있는 당사자들을 부정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 반대로 이 작업의 발신 방향이 즉물적으로 당사자성에 쉬이 기대고 있음으로 되돌이켜 그 의도를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곧 그러한 위로의 효과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그 방식과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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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천에는 똥이 많다>: 뛰어난 공간(에의) 감각, 문학적 소실점, 그리고 현재에 안착하기REVIEW/Theater 2019. 6. 20. 21:27
공간, 형태, 세계관의 연장 ▲ 드레스 리허설 장면 [사진 제공=두산아트센터](이하 상동) 를 구성하는 공간은 블랙박스의 형태를 비껴나서 작품의 세계의 면모를 구성한다. 또는 역설적으로 그렇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 공간에의 경험이 말과 캐릭터와 이야기를 파악하는 데 있지 않도록 무대는 하나의 공간을 이루고, 캐릭터와 말을 포함한 소리가 그 공간을 더듬어 나가는 것이 이 작업의 과정이 된다. 마지막에 이르러 주인공(화자)의 “거대한 오욕의 세계”는 물리적인 공간에서는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이는 문학적 서술 방식을 띤 탓에, 그리고 중간 중간 구체적으로 주인공 내면의 목소리가 3인칭 시점으로 전환되는 탓에 현실은 그 바깥이 되고 내면은 파악되어야 할 중핵이 되는데(현실에 위치한 인물들은 바깥으로 전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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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리얼리티(의 마법)를 관찰하기REVIEW/Theater 2019. 6. 16. 13:12
▲ 제프 소벨, [사진 제공=의정부음악극축제집행위원회](이하 상동)) 은 무대 위에 하나의 집, 한 면이 전면에 드러나게 집을 짓는 과정 속에서 사람들의 속살을 마치 관음증처럼 드러낸다. 가령 옷 갈아입을 때나 화장실을 쓰거나 샤워를 하는 장면에서 누드는 빈번하게 출현한다. 이는 논리적으로 당연한 것인데, 이것이 그야말로 보통의 우리가 집에 있을 때 다른 사람의 이목을 신경쓰지 않는다는 전제가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계속 사라지고 나타나며 지속된다. 그러니까 건축과 해체, 이사가 크게 하나의 사이클을 그리기는 하지만 그 단편들은 삶의 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고저 없는 동일 차원으로 반복된다. 그러니까 이 과정의 서사가 인물들에게서(개별적인 목소리나 관계에서) 오기보다는 시간의 변화라는 큰 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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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또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의 동기화(봉합/간극), 그리고 또 다른 서사 가능성REVIEW/Theater 2019. 6. 16. 12:50
▲ 라꼬르도네리 [사진 제공=의정부음악극축제집행위원회](이하 상동) 는 제목과 같이 ‘백설공주’를 현대적으로 각색했다고 볼 수 있지만, 무엇보다 이 작업은 우선 스크린에 현장 더빙과 연주가 더해진다는 사실이 전적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는 음악극이라는 축제 자체의 장르적 명명 속에서 한층 미묘하게 접힌다. ‘음악-극’, 곧 음악으로도 연극으로도 수렴되지 않는, 반면 그 둘을 더하는 것으로도 구성되지 않는 장르의 예외적 개념이랄까. 현장의 소리를 듣기 위해 원래의 소리를 삭제한/음소거한 스크린을 본다는 것은, 그 스크린이 온전하거나 그 자체로 충만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스크린 속 인물의 입과 그 바깥의 소리를 일치시키려 애쓰는데, 이는 단순히 연습/훈련을 통한 뛰어난 퍼포머들의 동기화에 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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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레 니나렐로(Daniele Ninarello)의 <쿠도쿠(KUDOKU)>: ‘움직임은 보는 것인가?’REVIEW/Dance 2019. 6. 16. 11:28
▲ 다니엘레 니나렐로 안무 ⓒ조태민(이하 상동) 무대의 불이 켜지지 않고, 한동안 완전한 어둠 속에서 음악의 향연이 펼쳐진다. 사실 어떤 움직임도 볼 수 없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분명 음악이 주는 실재를 환영으로 치환한 결과를 가져온다. 움직임은 정위되지 않는 음악처럼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이와 같은 인트로에서 볼 수 있듯 는 붙잡을 수 없음의 차원에서 움직임을 제시/지시하는 작업이다(‘움직임은 하나의 단위가 아니라 파편이거나 그 파편들의 끝없는 흐름이다’). 조명이 밝아지고 어떤 형상이 나타났을 때 그것은 실제 사람의 몸이고 또한 움직임을 펼치지 않는 고정된 형태인데, 여기서 음악의 연주자 역시 일자라는 사실이 발견된다. 따라서 보이지 않음으로써 그러나 음악의 매개를 통해서만 가능한 그런 보기의 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