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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진 <유용무용론>: 춤의 의미와 당위, 그 혼란으로부터REVIEW/Dance 2014. 10. 21. 17:41
▲ 최은진 [사진 제공=LIG아트홀] 최은진 은 유용한 것을 일상의 노동/행위로 두며 그 대척점에서 무용(舞踊)을 무용(無用)함으로 치환한다. 그리고 이 무용(無用)한 무용이 유용한 행위와 맞닿을 수 있는 지점을 모색한다는 식으로 이 작품의 테제를 선언한다. 그에 따르면, 그 말 이전에 발생한, 위성희가 객석에 있는 의자를 옮기고, 윤상은이 안무를 소화하는 두 대립된 장면은 춤무용론을 입증하는, 그리고 춤과 노동이 분절됨을 보여주는 작위적인 재현의 장이며, 앞으로 춤유용론의 경계를 만들어질 것으로 보이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한 것인가. 아니 그 당위 자체가 요구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노동과 춤의 유용함의 기준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오히려 춤이 사회적 기준에서 벗어나기에, 곧 유용하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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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무용단, 안무가 루이자 코르테시/미켈레 디 스테파노 공연 리뷰REVIEW/Dance 2014. 10. 21. 17:35
: ‘마법의 회전’으로서 안무의 마개 ▲ 연습 장면 [사진 제공=국립현대무용단] (이하 상동) 루이자 코르테시가 안무하고, 차진엽이 무용수로 출연한 은 각기 다른 뚜렷한 시공간을 상정하고 있는 가운데, 춤의 정면성을 내세워 일종의 윈도우로서의 프레임과 그와 맞닿은 표면에서의 신체적 감각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마우싱은 일종의 마우스를 가지고 윈도우를 작동시키는 행위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가상 세계, 그리고 그것과 상호 협응하는 인간 신체를 포괄적으로 지칭하기 위해 만든 조어에 가깝다. 그리고 사운드와 조명이 움직임과 긴밀하게 연관돼 시공간을 생성한다는 점에서, 그 장치(화)를 전면에 드러낸 것에 가깝다. 이로써 차진엽은 가상공간의 입자가 되는 셈이다. 차진엽은 우선 밀폐된 좁은 공간에서 로봇처럼 팔다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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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투명인간>: 벌레-괴물이 된 아버지-관객REVIEW/Theater 2014. 10. 21. 17:24
‘법 앞에서’ ▲ 연극 [사진 제공=남산예술센터] 아버지의 생신을 준비하던 가족은 암묵적 규약을 만든다. 그리고 아버지가 이들을 찾지만 이들은 정말 아버지를 외면(外面)하고, 그 경계의 외피를 파고들고자 하는 아버지는 계속 실패함으로써 단절된다. 그에게는 도달 불가능한 장벽이 있고, 더 이상 그것이 왜 그런지 알 수 없다. 어디서부터 잘못 됐는지, 그 스스로가 오인된 존재인지, 그 자신의 오인된 인식인지, 누구로부터 그것이 생겨나는지를 알 수 없다. 곧 투명한 ‘벽’이 생긴 셈이다. 마치 그 규칙의 동의와 시작 지점이 더 이상 그 기원을 찾을 수 없게 된 것 같은 시점에, 벽은 더 이상의 물리적인 실체로 드러나지 않아도 되었다. 그가 보이지 않는다는 건 더 이상 규칙이 아닌 사실이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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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 없는 미술관>, 미술관은 완전한 형상을 만들 수 있는가의 물음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14. 10. 1. 15:34
▲ 김지혜 [이미지 출처=국립현대미술관]http://www.mmca.go.kr/exhibitions/exhibitionsDetail.do?menuId=1020000000&exhId=201408060000100# 첫 번째 ‘인식장애극장’(방혜진 기획)의 에 이르기 전 두 가지 질문을 갖고 간다. ‘미술관은 안무를 구성/생성할 수 있는가?’와 ‘안무는 전시와 상충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는 각각 미술관의 극장화 내지는 퍼포먼스화의 역량, 그리고 전시 ‘속’ 안무의 실천과 함께 미술관의 전시품 보호의 임무/역량이 가능한가의 물음이다. 물론 이는 화이트박스 안에 블랙박스를 단순히 장착하는 것에서 조금 더 나아간 경우이다. 여기서 두 번째 물음은 전시장 안에서 퍼포먼스가 일어난다는 가정 하에 가능한 물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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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환 <늘 거울 생활> ‘적확한, 한정적 문맥의 교신’REVIEW/Visual arts 2014. 10. 1. 14:50
전시 (아트선재센터, ~11월 30일)은 관(람)객을 전시장 안에 포함시키며 개입시킨다. 이는 관객의 직접적인 참여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 관람 동선과 시각과 작품이 맞물리는 과정들을 체계적으로 구현했음을 의미한다. 제목에서의 ‘거울’이라는 알레고리는 난해한 듯 보이는 전시장 구성에서 관객의 위치나 시선, 비디오 작품에서의 이중적인 정체성 또는 균열, 수행으로서의 연기(演技) 등에서 나타나듯 실재를 보는 게 아니라 환영적인 체험을 통한 그 너머의 것을 나타나게 하는 어떤 방식과 연관되는 듯 보인다. ▲ Sung Hwan Kim, Watermelon Sons, 2014, Performance Courtesy of Sung Hwan Kim and Art Sonje Center, Photograph by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