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근영, 《활활》에 대한 주석: 하나의 수많은 얼굴들REVIEW/Visual arts 2026. 3. 3. 20:26
홍근영 작가의 《활활》은 얼굴을 전면화하는 일련의 도자 군집을 구성한다. 이 군집이 전시의 유일한 전략이며, 이는 전체적인 공간에의 산포와 그룹화의 경계 지대로의 구분으로 나뉜다. 이를 통해 군집은 복잡계의 기호학적 생태라는 의미를 구성하는 한편, 수많은 작업의 양산이라는 작업자의 정체성을 노정한다. 이로써 《활활》은 작가의 가상적 세계의 의식과 작가로서의 의식을 따로 또 같이 엿볼 수 있게 하며, 그 대신 전시의 큐레이팅의 변별적 의식을 유예한다. 작품들은 그 양적 측면에서나 공간의 점유 정도에서나 그리고 그 얼굴이라는 것에 대한 주목을 통해서나 ‘활활’ 타오르고 있으며, 이는 작품을 작가로 소급하는, 작가를 작품으로 환원하는 그런 전시라 할 수 있겠다, 곧 과잉의 물질적 토대가 그 자체의 미학을 결정..
-
극단 성북동비둘기, 〈걸리버스 2〉: 연쇄적인 이미지 기호들의 병치, 파국에서 쾌락을 맛보다REVIEW/Theater 2026. 3. 3. 20:23
극단 성북동비둘기의 〈걸리버스 2〉(2025)는 영국의 풍자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1667-1745)의 4부로 구성된 『걸리버 여행기』를 모티브로 하는데, 〈걸리버스〉(2022)가 소인국을 다룬 1부를 가져온다면, 이번에는 2부의 거인국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4부는 차례대로 무대화되며 일종의 시리즈물의 성격을 띠게 될 것을 예측하게 한다. 〈걸리버스 2〉는 『걸리버 여행기』가 아닌, 〈걸리버스〉 자체와의 연관성을 맨 앞의 부재의 공간을 통해(서만) 구현하며 시작한다. 〈걸리버스 2〉는 〈걸리버스〉와 독립된 작품이며 바로 그 지점을 여기서 공준하고 있지만, 오히려 이러한 ‘빈’ 형식으로서 인용이라는 점에서의 본질, 곧 공통됨이 성립한다. 현진영의 〈흐린 기억 속의 그대〉가 배경음악으로 나오고 텅 빈 ..
-
장혜영의 발화에 대한 단상: 담론 구성으로서 영화 그리고 정치라는 공통의 장소 - 오동진의 말을 문장으로 만들기의 기술을 통해Column 2026. 3. 2. 21:33
정의당 장혜영의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보낸 오동진 신임 집행위원장 선임에 대한 질의서는 그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를 담겨 있다. 이는 과거 오동진 영화평론가의 댓글 한 문장으로 소급된다. 이 질의서는 2005년 8월 12일 조국 조국혁신당 전 대표의 사면에 대한 장혜영의 페이스북에 쓴 비판에 대한 답변인 오동진의 비판에 대한 사후적 재처리로서, 엄밀히는 오동진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 비판을 경유해 오동진의 자격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를, 영화제의 불성실한 혹은 불합리한 선임의 비가시화된 과정 자체를 겨냥한다. 그러니까 이는 영화제에 오동진이라는 곤궁을 떠안기는 곤궁을 초래하는 셈인데, 질의서에 충실하게 답변하는 방식으로서, 오동진을 설사 소거했다고 해도, 그 절차는 잘못된 것이었음을 증명하는 일이 되기 ..
-
이민재, 《Doppel-Lumpen》: 시선으로부터 은신하기, 그 반대편에서 시선의 주인을 찾기REVIEW/Visual arts 2026. 3. 2. 21:20
《Doppel-Lumpen》은 작가의 수많은 복제된 형상을 마주하게 하는데, 이는 세 가지 퍼포먼스를 순차적으로 약간의 간격을 두고 반복해서 전시 내내 지속하는 체계 아래, 그 퍼포먼스 시스템이 작가 단독의 형상을 가시화하기보다는 그것이 끊임없이 지연되고 부인되면서 재가시화되는 국면 아래 있음을 의미한다. 곧 작가의 수행은 매체로서 사물-공간의 경유를 통해 그 행위의 명확함 대신에 그 매체에의 작가의 체현됨의 양상으로 구조화되는데, 따라서 작가는 매체를 투영하는 신체, 그것이 연장되는 신체적 부산물로 재결정되어진다. 아마도 가장 명확하게 작가가 드러나는 또는 전시명에서처럼 도플갱어로서 중첩된 존재 양상을 동시적으로 관철하는 유일한 작업은 〈앙스트할레에서의 도플갱어 Doppelgänger in der A..
-
김방주, 《그냥 생긴 기억》: 사물을 놓아두는 법―충동을 경유해REVIEW/Visual arts 2026. 3. 2. 21:15
김방주 작가의 개인전 《그냥 생긴 기억》은 어느 날 자신에게 ‘떠맡겨진’ 아버지의 집과 사물들을 “‘되돌려’” 놓는 방식을 취한다. 작가를 초과하는 물건‘들’, 또는 그것으로서 집은 아마도예술공간이라는 전시장을 상회하는 차원으로, 초과된 시공간의 차원으로 다시 열리는데, 아마도 이는 작가의 현상학적 체험에서의 난감함, 곤궁, 비릿한 숭고, 알 수 없는 심연 등의 여러 추정되는, 해소되지 않는 복합적 정서와 심리, 미학적-윤리적 기전을 재현이 아니라 전치를 통해 관객에게 수여한다고 보인다, 그가 “갑자기” 그것을 떠맡게 된 것과 같이. 하지만 그것은 그 자체보다는 그것에 대한 어떤 자리를 주는 것에 가까운데, 곧 그것을 주는 건 작가를 초과하는 그 무언가를 셈할 수 없는 상태로, 셈하지 않고서 그냥 놓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