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 ‘의미는 삶을 유예하고, 때때로 삶은 의미를 초과한다’REVIEW/Theater 2017. 12. 5. 00:28
▲ (권여선 원작, 박해성 각색/연출), (사진 좌측부터) 배우 신지우, 우정원, 신사랑, 노기용, 황은후 [사진 제공=남산예술센터] 연극의 시작과 함께 튀어나오는 ‘삶의 의미는 없다’는 말은 신은 없다는 말을 의미한다(제목이 수렴하는 지점은 당신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것이 하필 ‘당신’이라는 것이다. 이는 당신‘이’에서 주격 조사의 차이에 기인한다). 사실 이는 신의 존재를 의심하며 신의 부재를 차라리 믿겠다는 유신론자의 좌절로 읽힌다. 삶의 커다란 고통, 죽음의 멍에를 짊어진 인물들, 특히 언니 해언이 돌연 살해된 이후 그 부재를 희미한 기억들로 채우고자 하는 애도 불능의 시기를 겪으며 삶의 의미를 논하는 다언(신사랑 배우)의 물음에서 이는 의존할 데 없는, 긍정할 수 없는 삶..
-
블라스트 씨어리, 《당신이 시작하라》: ‘관객의 탄생’REVIEW/Visual arts 2017. 12. 5. 00:05
▲ , 2015, 싱글 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시간 45분 ⓒPatrica Marcoccia and Oscar Tosso [사진 제공=백남준아트센터] (2015)는 연속되는 하나의 쇼트 안에 한 명씩 연결해 도시를 걷는 일곱 명의 사람을 다룬다. 동시에 이는 온라인과 극장에 실시간 스트리밍되었었다. “당신이 바꾸었으면 하지만 바꿀 수 없는 건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이 일곱 명을 관통하고, 일곱 명을 향한 질문은 다른 답을 도출한다, 아니 질문은 다른 세계로의 접속을 요청하는 질문으로 환원된다. ▲ , 2009, 싱글 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5분 ⓒAnne Brassier [사진 제공=백남준아트센터] (2009)에서 전화를 받은 관객이 율리케와 아이몬 중 한 명을 선택하고 도시 곳곳을 걷고..
-
이해성 작/연출, <비명자2>: ‘사회적 의제의 직접적 반영’REVIEW/Theater 2017. 11. 28. 23:25
▲ (작/연출 이해성) [사진 제공=극단 고래] (이하 상동) ‘(소수의) 타인의 한정할 수 없는 고통은 결국 사회적 고통으로 전이된다’는 작업의 교훈은, 타인의 고통을 사회적 고통으로 체감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측정할 수 없는 고통으로 정의되(지 않)는 그들의 고통은 결국 소통이 불가능한 비언어의 양적 크기로 측정되며(‘반경 4km까지 물리적 영향을 끼치는’) 동시에 이해 불가능한 이해로, 말할 수 없는 우리 자신으로 수렴된다. 곧 이 작업에서 ‘타자의 고통은 우리의 고통이다’라는 명제와 ‘타자의 고통은 절대적인 것이다’라는 명제는, 그런 ‘타자의 고통을 우리가 이해할 수는 없어도 공감할 수는 있다’는 명제를 더하며,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나아가게 된다. 우리는 비명을 끊임없이 지르는 끊임없이 죽..
-
<비평가>: ‘비평과 창작’에 대한 알레고리REVIEW/Theater 2017. 11. 28. 22:44
▲ 후안 마요르가(Juan Mayorga) 작/김재선 역, 이영석 연출, 포스터, (사진 왼쪽부터) 김승언, 이종무 배우 [사진 제공=K아트플래닛] 어느 날 한 극장에 오른 작품이 기립박수를 받는다. 그 희곡을 쓴 작가가 자신의 작업에 대해 꾸준히 비평을 해온 비평가의 집을 찾는다, 와인을 들고. 이런 설정은 이후 두 사람의 강력한 설전으로 숨 가쁘게 이어지며, 작가와 관계 맺는 비평가의 역할, 나아가 연극의 기능과 정의를 상기시키는 것으로 나아간다. 작업이 재미있는 부분은 각자의 날 선 입장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주로 ‘대비’되는 층위에서 비평과 창작에 대한 관점이 지금에 있어서도 유효한 부분이 있다는 것인데, 거기서 체현되는 건 인물이라기보다 수사의 설득력과 그 자체의 매력, 곧 말일 것이다...
-
정다슬/요하네스 칼, <당신이 그것에 대해 알고 싶었던 모든 것>: ‘말하기로서의 움직임’REVIEW/Dance 2017. 11. 20. 18:13
▲ 정다슬(왼쪽), 요하네스 칼, ⓒ조현우 남성의 포즈들은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 (1863)와 (1863)의 여성 누드의 모습들을 포즈를 입체적으로 옮기는 가운데 상정한다. 남성이 여성을 표상하며 동시에 여성이 아닌 남성 관객을 보는 것은, 재현적 섹슈얼리티를 수행적이고 비판적인 언어로 전유하는 것이다. 이어 남자는 섹스/자위가 오로지 정액의 배출이라는 최종 결과에만 향해 있음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데, 성적 쾌락은 따라서 일정한 절차와 일관된 결과라는 성질을 갖는다. ▲ 요하네스 칼, ⓒ조현우 두 퍼포머는 대부분 말과 움직임이라는 구분된 역할, 동시에 평등한 역할 놀음으로 무대를 채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관없이, 그러니까 기존의 남성과 여성에 대한 편견에 저항하며. 예외적으로는 자신의 작달만한 신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