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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리얼리티(의 마법)를 관찰하기REVIEW/Theater 2019. 6. 16. 13:12
▲ 제프 소벨, [사진 제공=의정부음악극축제집행위원회](이하 상동)) 은 무대 위에 하나의 집, 한 면이 전면에 드러나게 집을 짓는 과정 속에서 사람들의 속살을 마치 관음증처럼 드러낸다. 가령 옷 갈아입을 때나 화장실을 쓰거나 샤워를 하는 장면에서 누드는 빈번하게 출현한다. 이는 논리적으로 당연한 것인데, 이것이 그야말로 보통의 우리가 집에 있을 때 다른 사람의 이목을 신경쓰지 않는다는 전제가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계속 사라지고 나타나며 지속된다. 그러니까 건축과 해체, 이사가 크게 하나의 사이클을 그리기는 하지만 그 단편들은 삶의 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고저 없는 동일 차원으로 반복된다. 그러니까 이 과정의 서사가 인물들에게서(개별적인 목소리나 관계에서) 오기보다는 시간의 변화라는 큰 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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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또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의 동기화(봉합/간극), 그리고 또 다른 서사 가능성REVIEW/Theater 2019. 6. 16. 12:50
▲ 라꼬르도네리 [사진 제공=의정부음악극축제집행위원회](이하 상동) 는 제목과 같이 ‘백설공주’를 현대적으로 각색했다고 볼 수 있지만, 무엇보다 이 작업은 우선 스크린에 현장 더빙과 연주가 더해진다는 사실이 전적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는 음악극이라는 축제 자체의 장르적 명명 속에서 한층 미묘하게 접힌다. ‘음악-극’, 곧 음악으로도 연극으로도 수렴되지 않는, 반면 그 둘을 더하는 것으로도 구성되지 않는 장르의 예외적 개념이랄까. 현장의 소리를 듣기 위해 원래의 소리를 삭제한/음소거한 스크린을 본다는 것은, 그 스크린이 온전하거나 그 자체로 충만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스크린 속 인물의 입과 그 바깥의 소리를 일치시키려 애쓰는데, 이는 단순히 연습/훈련을 통한 뛰어난 퍼포머들의 동기화에 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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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레 니나렐로(Daniele Ninarello)의 <쿠도쿠(KUDOKU)>: ‘움직임은 보는 것인가?’REVIEW/Dance 2019. 6. 16. 11:28
▲ 다니엘레 니나렐로 안무 ⓒ조태민(이하 상동) 무대의 불이 켜지지 않고, 한동안 완전한 어둠 속에서 음악의 향연이 펼쳐진다. 사실 어떤 움직임도 볼 수 없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분명 음악이 주는 실재를 환영으로 치환한 결과를 가져온다. 움직임은 정위되지 않는 음악처럼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이와 같은 인트로에서 볼 수 있듯 는 붙잡을 수 없음의 차원에서 움직임을 제시/지시하는 작업이다(‘움직임은 하나의 단위가 아니라 파편이거나 그 파편들의 끝없는 흐름이다’). 조명이 밝아지고 어떤 형상이 나타났을 때 그것은 실제 사람의 몸이고 또한 움직임을 펼치지 않는 고정된 형태인데, 여기서 음악의 연주자 역시 일자라는 사실이 발견된다. 따라서 보이지 않음으로써 그러나 음악의 매개를 통해서만 가능한 그런 보기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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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2.0>: <유도>의 대극장 버전!?REVIEW/Dance 2019. 6. 16. 11:19
▲ 박순호 안무 ⓒ조태민(이하 상동) 박순호가 안무로 참여하고 새롭게 Rising Tide Dance Theatre로 팀을 구성하여 대극장으로 옮겨진 이번 작업은, 이전 중극장 정도의 규모에서 열렸던 박순호의 작업 (2014)와는 다른 구성과 형태를 지향한다. 애초 이 작업이 지향하던 바와 현재의 작업이 갖는 의미를 지난 작업과의 비교를 통해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은 대극장용의 커다란 음악에 힘입어 반복된 구문들을 반복하여 정형화된 군무의 형태를 띤다. 그것은 현장에서 감식되는 음악 바깥의 틀, 곧 동기화될 수 없는 어떤 타격이 주는 이차적 음들을 생략하고, 이미 결론에 다다른 어떤 형태들을 반복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것이 어떤 몰입이라는 것을 가정하는 스펙터클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타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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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ylum>: 스펙터클에의 간극을 구성하기REVIEW/Dance 2019. 6. 16. 11:14
▲ 라미 비에르 안무 , 키부츠현대무용단(Kibbutz Contemporary Dance Company) ⓒEyal Hirsch 조명을 쨍한 햇빛인 양 ‘쬐는’ 가운데 군집된 확성기를 단 사람이 소리 치는 첫 장면은 분명히 어떤 세계의 환유다. 분명 그것은 증폭되는 사운드와 함께 단연 부각되는 한 명의 지배자의 논리를 통해 명확해진다. 이는 장소 잃은 난민의 형상을 주조하고 재현하는 대신 그 군중과의 거리를 형성하는 지배자만큼의 안전한 거리에서 이들을 포획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들은 계속해서 사실 입체적인 세계를 재구성한다. 이는 어떤 처절한 현실이나 비판적 거리 두기가 아닌 끊임없는 공간의 변전 자체, 그리고 그 속에 포화된 개인들의 행렬을 통해 동시적으로 드러난다. 확성기는 배경 음악으로,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