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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알리바이 연대기>: '과거를 현재로 깁는 경험적/서사적 시선'REVIEW/Theater 2013. 9. 28. 00:46
▲ 연극 [사진 제공=국립극단] (이하 상동) 는 아버지와 아들의 시차적 삶의 재현을 한국 근현대사의 연대기의 큰 흐름으로 두는 가운데, 회상으로써 순간적인 에피소드들로 과거와 단절된 일상의 영속된 시간 안에 과거로부터 현재를 다시 깁는다. 이 회상의 형태가 현재에 머물러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 과거의 현전으로 나타나며 이는 현재를 재구성하게 된다. 마치 시간 여행을 떠나 과거를 현재의 시점에서 체험하며 혼합된 시간을 경험하는 역사 탐험의 교과서적 만화를 보는 것 같은 매체의 전이가 느껴진다. 이러한, 과거를 재현하는 이야기 형식‧현전의 양태‧혼합된 시간으로서의 측면은 를 그야말로 현재와의 연대를 맺는, 현재로부터 출발한 나아가 과거까지를 다루는 연대기가 되게끔 한다. 박정희와 동시대를 산 김재엽 연출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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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에 관한 첫 번째 주석카테고리 없음 2013. 9. 28. 00:15
▲ 영화 의 공식 포스터 ⓒ 나우필름(주), 파인하우스필름(주) 영화의 가쁜 호흡에 숨죽인 채 영화를 봤다. 두 시간이 넘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영화에 대한 후속 반응은 대체로 여진구에 대한 격찬과 주제에 대한 모호함에 대한 토로 즉 삐걱거리는 내지는 너무 많은 것이 담겨 있다는 비판의 날이 담긴 의견 정도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전자는 여진구란 배우에 대한 순전한 몫을 의미하는 대신 당연하게도 영화의 무게가 여진구가 맡은 화이란 역에 쏠려 있음을 반증하는 것일 테고, 후자는 이 영화의 구조적 완성도를 논하기 전에 영화가 다루는 주제가 실상 그리 만만치만은 않음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두 개의 반응 혹 물음은 화이로부터 출발하며 화이로 귀결된다.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우리는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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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즉흥상설-고수푸리 '몸의 대화': '즉흥', 춤이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자리REVIEW/Dance 2013. 9. 26. 14:57
즉흥은 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것으로만 두기에는 다소 부족해 보인다. 춤이 생성되는 순간 춤으로써 춤에서 미끄러지며 또 다른 춤으로써 춤이 되려는 시차적이고 불가능한 시도가 즉흥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는 다시 춤, 춤의 현전이 아닐까. 춤은 상대방을 의식한다. 그리고 그 몸에, 춤의 틈에, 춤의 드넓은 장에 들어가기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다. 아니 먼저 춤을 시작한 이로서는 상대방이 우발적으로 들어오기를 동시에 안정적으로 안착하기를 바라며 틈을 벌리고 있다. 이런 절대적인 타자성과 조심스러움, 그리고 쫓고 쫓김으로 나타나는 이후 양상은 곧장 춤이 되지 않는 끊임없이 간극을 벌리는 시차에 다름 아니다. 유빈 댄스, 그리고 이나현의 춤이 갖는 실체적, 질료적 측면이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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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천개의 눈>: '존재의 틈으로서 미로'REVIEW/Theater 2013. 9. 26. 14:52
▲ [사진 제공=남산예술센터] 의 역사적 배경은 딱 해설에서 나온 짧은 정리 문구의 정도에 불과하다. ‘자로’의 심중 자체가 은유적 차원에서 미로이며, 이는 앞선 ‘타로’의 미궁이라는 환유적 차원에서 실제 지배되는 것에서 연유했음을 알게 될 때 이 미로는 관념의 차원으로 소환 가능한 그 무엇이다. 미궁은 고르기아스의 매듭처럼 단순히 끊어 버리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오히려 미궁에서 나오기 위해 그만큼의 섬세한 실 뭉치의 매듭을 다시 풀어야만 한다. 미궁은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 대상 차원이 아니며 나를 옭아매는 나를 전적으로 둘러싸고 있는 어떤 불가능성의 차원에서의 장을 가리킨다. 타로의 등골에 칼로써 간극을 벌일 때, 베기보다 서서히 그 심연의 틈을 더듬어 어둠의 아가리를 벌릴 때(이는 정확히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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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프린지페스티벌, '제한 없음의 참여를 위한 가이드가 필요해'PREVIEW/Festival 2013. 9. 25. 12:34
▲ 서울프린지페스티벌2013 포스터 올해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이하 프린지)의 참가 장르는 연극이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실내 작품이 삼분의 이 이상을 차지한다. 몇 년 사이에 프린지는 극장이라는 공간과 연극을 비롯한 환영‧현존‧재현 등의 범주와 관련을 맺는 공연예술로 초점이 옮겨 갔다 보인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바는 막연히 홍대를 상징하는 음악과 야외 공연이 프린지를 구성하고 있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티스트의 참여에 제한을 두지 않는, ‘심사를 표방하지 않는’ 프린지의 아이덴티티가 모든 장르를 포함한다기보다는 공연예술 축제로서의 비중이 커진다는 것, 그리고 홍대를 거점으로 작업하는 대부분의 (음악‧미술) 예술가를 포함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은, 암묵적으로 참여 아티스트에 대한 장르에 대한 포커스가 달라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