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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코러스:오이디푸스>: '생생한 원작'의 구현...REVIEW/Theater 2013. 10. 18. 15:13
▲ [사진 제공=LG아트센터] (이하 상동) 는 더 코러스란 수식어가 붙지만, 당연하게도 소포클레스의 원작 『오이디푸스』의 2차 텍스트이자 동시에 수많은 2차 텍스트의 해석적 담론들에 대한 참조와 변형, 궁극에는 자유로운 해석의 귀결로 나아가는 헝클어진 내지는 또 다른 텍스트들과 달리 오히려 2차 텍스트로서 원전에 충실한 편이다. 한편, 그리스 연극에서의 주인공과 코러스의 위계적 분리 이전에 코러스가 갖는 높은 비중으로서의 역할을 회복하려는 시도가 합창으로서 갖는 말의 울림으로써 또 무대의 입체적인 재편의 지속으로써 극을 풍부하고도 다른 모습으로 표현하게끔 만든다고 볼 수 있다. 오이디푸스는 테베에 주어진 벌에 대한 죄의 원인을 (합리적으로) 찾고자 하고, 이는 원인과 결과의 인과론적 전제를 전제하며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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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F2013] <메디아 온 미디어>: 미디어의 재전유REVIEW/Theater 2013. 10. 16. 13:27
▲ [사진 제공=한국공연예술센터] 제목처럼 미디어로 중개‧중계되는 메디아에 대한 이야기다. 계속 역동적으로 달라지는 각기 다른 미디어 속 모습들로부터 취해 온, 흰색 프레임 속 장들의 변전은 일종의 역할 놀이이자 중계되는 쇼로, 그 사이에 그 역으로 분하는 장 바깥으로의 준비가 있다. 메디아에 대한 내용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또 다른 매체로 전해지고 있음을 메타적으로 구현하며 미디어 형식(의 달라짐) 그 자체를 보여주며 그 내용을 현실의 유비 관계로, 매체가 전하는 삶의 형식들 자체로 연장/확장한다. 이는 곧 ‘미디어는 메시지다’의 맥루한의 전언을 상기시킨다. 미디어 속 모습으로 연극을 꾸밈에 따라 미디어와 연극은 서로 간의 절합의 측면을 중간 중간 가져가게 된다. 메디아의 기자회견장으로 시작된 연극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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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F2013] <스푸마토>: 현존을 만드는 방식의 안무REVIEW/Dance 2013. 10. 16. 13:15
▲ [사진 제공=한국공연예술센터] 배로부터 피어나며 위쪽으로 느리게 도달하며 무대를 장악하며 겹에서 또 다른 겹으로 펼쳐지는 안개, 이것을 자연 그 자체에 대한 환유이자, 비자의적인 안무 그 자체로 보지 않는다면 이 작품의 특질과 메시지 이전의 표현의 강력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것이다. 그 안에서 안개에 뒤섞여 끊임없이 돎의 현존을 추구하며 이동하는 축을 가진 자동 회전 기계의 비인간의 형상으로 변해가는 여자 무용수의 몸짓으로 보이는 움직임은 그 은근하고 거대한 현존에 조응하는/맞서는 또 다른 생명의 현전이라는 서사 차원에서의 전개와 몸짓이든 수용의 측면에서건 인간으로서 어떤 가용 범위를 넘어서는 듯한 바로 그 부분에서의 현존이 맞물리고 있다. 후자는 그야말로 처음에는 느리게 도무지 믿을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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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특이행동퍼포먼스>: 4개의 특이한 퍼포먼스'들'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13. 10. 16. 02:06
(두댄스 씨어터+건축사무소 SOA): 축자적 ‘건축’과 비-인간 되기 (feat1968-) 굳어져 가는 형성 과정으로서의 건축의 시차적 작용, 곧 완성되었을 때 그야말로 끝나는/용도 폐기되는 매체로서, 단지 과정으로서만 유효한 역설적 건축의 젤라틴 의상과 그와 결부되는/절합되는 몸짓, 이는 흐름과 그것의 연장, 인간-주체의 움직임/안무로 볼 수 없는, 말하자면 비인간의 형상-되기의 안무였는데 이는 그 의상의 생성 작용의 신체의 안무의 제약과 함께 한편으로 사각형 패널 속이라는 공간적 제약에서 기인하는 부분이었다. 이를 의상과 투명한 공간의 건축적 요소들과 결부 짓지 않을 수 없지만, 움직임 자체로만 본다면 곽고은은 투명 매체로 연장되려는 경향을, 공영선은 곽고은과 간접적인 관계 맺기의 측면에서 연장하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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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광부화가들>: '예술(의 의미)'의 시차적 도착REVIEW/Theater 2013. 10. 11. 15:07
▲ 연극 [사진 제공=명동예술극장] (이하 상동) 일차 텍스트 곧 대본을 현재화하는 연극의 특성을 전제하면, 동시대성을 띤 작품은 단순한 재현 이상의 것을 넘어, 현재에 (정치적으로든 문화 비평적으로든) 유의미한 감각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1934년 영국 북부, 우여곡절 끝에 애싱턴 노동자교육협회에 속한 광부들의 미술 감상 수업을 맡은, 예술에 대한 어떤 편견도 배제하고자 하는 선생 라이언의 등장은 일견 이 작품의 초반을 카르페 디엠이란 개념을 우리에게 전파했던 의 로빈 윌리엄스를 떠올리게 한다. 반면 구체적으로 그가 전하는 예술의 의미는 작품의 의미가 주어져 있는 것(작가의 의도나 작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림을 보는 사람이 받아들이는 부분에서 발생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이미 바르트의 수용자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