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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틀리스 무용단(Restless Dance Theatre), 〈노출된(Exposed)〉: 재현 불가능한 혹은 재현 너머의 현존REVIEW/Dance 2023. 11. 6. 15:00
테크닉은 신뢰와 직결된다. 자연스러움과 매끈함이 동시에 충족될 수 있으며 하나의 계열이라는 믿음이 그것에 따라붙는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있는 레스틀리스 무용단의 〈노출된〉은 그러한 전제로부터 요동친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몸짓 자체를 추종하거나 그 몸짓이 향하는 의미의 계열을 구성하기 위해 몰입하지만, 그 몸짓을 의심하지는 않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레스틀리스 무용단에서 움직임은 그런 차원에서 몸짓에 선행하는 것, 곧 몸 혹은 감정이 몸짓 앞에 있다고 선언한다, 또는 드러낸다(exposed). 따라서 극단적으로는 몸은 멈추거나 해서 강조되고 감정은 연기되는 데서 나아가 폭발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몸은 몸짓에 선행하고 감정은 몸짓을 앞지른다.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무용수가 옷을 걷어붙이고 맨몸을 드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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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동 안무, 〈리듬의 측〉: 움직임이 곁에 머무는 방식REVIEW/Dance 2023. 9. 12. 00:35
〈리듬의 측〉은 하나의 평면에 속한 ‘사회’적 존재들을 가시화한다. 이는 개인을 초과하는 거대한 배경을, 이를 부분으로 축소하고 해체하는 개인의 주체적 역량을 동시에 지시한다. 이는 그 사회가 유기적인 질서와 통합된 풍경으로서 존재하거나 긴밀한 관계들의 연속으로 진행되는 곳이 아님을 이야기한다. 오히려 존재는 우연적이며 우연에 의해 존재가 탄생한다. 무작위성이라는 ‘원칙’은 질서와 규칙, 상승과 하강의 흐름이 부재함을 의미하며, 단지 움직임의 차이와 반복이 끊임없이 나타나는 환경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가장 평평하고 창발적인 장이 된다. 그렇다면 이는 동작에 대한 충실도를 요청하는가. 아님 그것이 하나의 환경이라는 명제를 내세우는가. 곧 형식으로 그치는가. 아니면 어떤 이념을 내포하는 것인가. 〈리듬의 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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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숲우화-짐승의 세계〉: 연극을 만들어 나가는 힘의 요체란REVIEW/Theater 2023. 9. 12. 00:24
〈이숲우화-짐승의 세계〉(이하 〈이숲우화〉)는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제목이 말해주듯 ‘이솝우화’의 여러 서사를 언어 유희적 농담으로써 전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이솝이란 남자’. 뒤이어 ‘여우와 두루미’, ‘토끼와 거북이’, ‘개미와 배짱이’, ‘달에 간 까마귀’로 이어지는 네 개의 에피소드는 마지막 막에 이르러서야 파생 서사의 일단락을 짓는다. 곧 서사의 유희로써 유희적인 서사를 갈음하는 실험이든 유희이든 그 형식은 서사의 내용을 명확하게 만들기보다는 서사를 이렇게 간단하게 작동시킬 수 있다는 차원을 보여준다. 곧 서사와 유희 사이에 무수한 서사‘들’이 자리한다. 반면, ‘달에 간 까마귀’는 앞선 작업들을 일종의 예열 작업으로 두면서 사이의 서사로서 위치하는 게 아닌, 서사 자체의 동력을 가시화한다. 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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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옥 연출, 〈혁명의 춤〉: 구조는 완결되는 것인가REVIEW/Theater 2023. 9. 12. 00:09
〈혁명의 춤〉은 혁명의 이념을 혁명의 이미지로 대체한다. 여기서 혁명의 이미지는 작품 전체의 이미지는 아니다. 짧은 대사들, “이쪽이야!”, “뭐지?”, “기다려!”, “들려?”, “그들 거야!”, “누가 오고 있어” 등, 위치를 지정하는 지시 대명사, 하나의 동사이거나 두세 개의 단어로 이뤄진 구문은, 상대방과의 관계를 맺으며, 각기 다른 여덟 개의 장면으로 반복된다. 이 여덟 개의 장면에서 엄밀히 혁명의 이미지를 수여하는 건 마지막 단계 직전에 이르러서이며, 그 전의 이미지들이 혁명을 위한 모종의 단계로 적용되는 것 역시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혁명의 이미지는 작품 전체의 이미지가 아니다. 이러한 이미지를 둘러싸고 있는 건 긴장과 긴박함의 정서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서는 그것을 그 자체로 두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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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변방연극제: 연극을 파훼하기REVIEW/Theater 2023. 8. 18. 11:37
변방연극제는 “취약하고 오염되고 더러운 것들의 축제”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웠다. 이는 “변방”에 대한 새로운 정의이면서 연극제 안의 작품들의 다양한 코드로 분화하게 된다. 오염과 더러움이 같은 의미라면, 취약함은 조금 다른 양태의 단어라 하겠다. 전자가 세상의 시선으로부터의 부정적 규정을 뜻한다면, 후자는 어떤 부분의 구조적인 결여나 미비함 따위를 지시하지만 전자에 비해 그 자체가 절대적인 부정이 되지는 않는다. 이는 말 그대로 하나의 유기체적인 전체의 구조가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를 일컫기 때문이다. 내적인 차원에서는 후자가 연약함과 맞닿는다면, 전자는 그런 부정적인 규정에 대한 저항으로 전복될 수 있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이번의 변방연극제는 세상의 원칙을 파훼하는 형식을 더욱 적극적으로 찾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