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The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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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처 오브 포겟팅〉: 표현으로서의 재현REVIEW/Theater 2022. 5. 22. 11:36
음악의 전개와 움직임의 긴밀한 협응으로 진행되는 〈네이처 오브 포겟팅〉은 전체적으로 역동적인 음악이 공간을 장악하며 이미지적인 장면들을 만드는 것으로 점철된다. 이러한 충만한 무대로의 입력은 최소한의 대사를 ‘나지막한’ 또는 읊조리는 듯한 목소리로 치환한다. 피지컬 씨어터라는 장르로 명명되는 작업으로, 배우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음악의 거센 파고에 몸을 싣는다―피아노, 바이올린, 드럼, 퍼커션, 루프 스테이션 등의 2인조 밴드―김치영, 조한샘―가 악기를 다룬다. 참고로 영국 프로덕션 ‘시어터 리(Theatre Re)’의 기욤 피지 연출과 알렉스 저드 작곡가 등이 만든 오리지널 공연이 2019년 외국 배우들의 출연으로 같은 장소인 우란문화재단 우란2경에서 오른 바 있으며, 이번에는 한국 프로덕션의 협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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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짝 프로젝트 〈툭〉: 판타지는 어떻게 현실에 개입하는가REVIEW/Theater 2022. 5. 10. 04:27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는 꾸준히 ‘세월호’를 주제로 매년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아마 이는 이를 어떤 서사로 연장할 수 있을 것인가의 차원에서 소재 고갈 같은 극작술의 시련, 그리고 지속하는 것이 옅어지고 무력화되는 가운데 작업 자체가 더 이상 가능한지에 대한 자기 윤리에 대한 의구심에 대항해야 함을 의미할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를 포기할 수 없는 곧 지속해야만 하는 제도적 차원에서의 상징적 위치 역시 작용할 것이다. ‘세월호는 직접 드러나서는 안 된다.’ 또한 ‘세월호에 대한 알레고리가 단순히 죽음과 슬픔으로 치환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이 같은 두 개의 원칙은 아마 세월호를 신중하게 다루는 기본적인 전제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세월호’와 ‘나’, 그리고 ‘사회’의 어떤 긴장 어린 관계항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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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엽 연출 〈커뮤니티 대소동〉: 하나의 커뮤니티를 가설하기란…REVIEW/Theater 2022. 4. 14. 01:48
접촉을 통한 우리의 형성 〈커뮤니티 대소동〉은 접촉에 대한 감각을 강화한다. 안대를 쓰고 들어간 어둠으로 뒤덮인 극장에서 안대를 벗으며 시작된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감각은 무언가를 보지 못한다는 감각과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곧 어둠을 보는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은 ‘시각적으로 판별되지 않는’ 세계에서 목소리와 타자를, 무엇보다 발 디딜 공간에서 그것들을 예측할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커뮤니티 대소동〉은 이진엽 연출이 속한 ‘코끼리들이 웃는다’의 〈몸의 윤리〉(2015)의 재판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몸의 윤리〉가 보이지 않는 곳이 우리의 변화를 시도하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함을 의도하고 동시에 다른 우리의 감각을 활성화하고자 했다면, 총 아홉 명 중 과반수의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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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조 이야기〉, ‘부채의식을 떠안고’REVIEW/Theater 2022. 4. 14. 01:28
〈금조 이야기〉는 한국전쟁 당시 딸을 잃어버린 채 딸을 찾아 나서는 금조의 여정을 주된 서사로 하되, 거기에 그 주변의 여러 역사적 맥락을 교차 편집한다. 여기서 여러 이야기는 역사에 대한 다각적이고 입체적인 시각보다는, 동시에 그 모든 인물의 내적 동기를 형성하며 그들 간의 관계를 구성하기보다는 전쟁 안에서 비이성적인 인간으로의 형질 변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수렴하며, 결과적으로 정주할 수 없는 금조의 삶, 그의 지연되는 도착을 더욱 강조한다고 보인다. 관객에게 그 고통은 곧 다른 시간만큼 더 유예된다. 금조는 그와 여정을 함께하는 들개 아무르와 함께 유일하게 거의 모든 곳을 경유하며 존재들을 스쳐 지나갈 뿐 그 모든 서사가 그와 온전히 결부되거나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안을 점유하지 못하고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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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피그,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 문명 이후에 대한 어떤 태도REVIEW/Theater 2022. 4. 5. 22:55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는 윤영선의 7쪽짜리 초고로 된 동명의 원작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2012년 윤영선 연극제에서 초연된 작업이다. 당시 공동 창작 과정과 전성현 작가의 참여로 단편들이 더해지며, 원작이 새롭게 재구성, 연장되었고, 이번 공연은 현재의 시점에서 일부 갱신되었다. 2012년 작이지만, 현재 시점에 조금 더 부합하며 동시에 전위적이다. 이 단편들은 물리적으로 하나의 서사로 연결되지 않음을 의미하지만, 총 4개의 에피소드 각각은 “신발”이라는 모티브를 반복하며, 마지막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 편에서 원숭이탈을 쓴 배우가 탈을 벗고 대사를 하면서 원전의 시점으로 돌아감―초고 일부와 초고가 쓰인 시점을 명시한다!―으로써 각 에피소드의 연관성은 언어적으로 정립되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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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돌파구, 〈XXL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 활극과 정치적 주체의 변경 사이에서REVIEW/Theater 2022. 3. 24. 00:43
“XXL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이란 제목은 세 명의 등장인물들이 소유한 각각의 주요한 오브제다. 즉물적이고 감각적인 사물에 대한 지시처럼, 작품은 현실에 기반을 두며, 역할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갖고 동시대와 공명할 것을 요청한다. 이러한 역할이 갖는 보편적 특정성은 시대적 생산양식으로서의 주체들로서 배우들이 어떤 역할을 맡는지에 대한 소개와 함께 그 역할을 입는 것임을 소개하며 시작하는 출발 지점에서부터 드러난다. 이는 이 연극의 유일한 메타-연극의 연출 지점이라는 데서 특기할 만한데, 통상 전제된 희곡에서 연극으로의 번역을 지시함으로써 이를 한 번 더 꼰 또는 내파하는 시점을 제시한다. 곧 연극을 희곡으로 되돌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데, 오로지 수행적으로만 이것들이 앞으로 놓일 수 있음을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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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란 구성·연출,〈이것은 어쩌면 실패담, 원래 제목은 인투디언노운(미지의 세계로, 엘사 아님)〉: ‘대화를 위한 재현’REVIEW/Theater 2022. 3. 23. 23:41
박지영 배우는 수어로만, 이원준 배우는 수어에 대사를 섞지만, 음성 언어의 비중이 크다. 박지연은 핸드스피크 소속 배우이며, 이원준은 작년까지 국립극단의 단원이었던 연극 배우이다. 이러한 정보는 공연 도중에 나온다. 〈이것은 어쩌면 실패담, 원래 제목은 인투디언노운(미지의 세계로, 엘사 아님)〉(이하 〈실패담〉)은 처음부터 수어를 하는 박지영을 중앙에 두며―그 바깥의 음성 언어로 출발함에도 그의 자리는 유지된다.―, 〈실패담〉은 박지영의 수어의 공간에 음성 언어를 동시적으로 작동시키지 않고 그의 온전한 무대로 위치시킨다. 부가적으로 음성 언어가 따라붙지만, 이는 앞서 말한 것처럼 주변의 위치에서만 작동한다. 이는 어떤 시차를 통한 번역, 더듬거리며 그 말을 따라가는 행위로서 성립한다. 언제나 음성 언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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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연 작, 동이향 연출, 〈밤의 사막 너머〉의 시공간: 참조 체계의 문학적 글쓰기의 공간REVIEW/Theater 2022. 3. 23. 21:51
핍진한 현재 〈밤의 사막 너머〉는 몇 개의 플롯들을 반복하며 강화한다. 주인공은 현실과 이격된 터전 없는 세계를 부유하며, 끝이 없는 길을 걷고 또 걷는다는 것. 세계의 종착지는 ‘지구는 둥그니까’의 논리로 지정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걷기는 끝이 없는 것이며, 단지 그 끝이 (있다면) 죽음뿐임을 지시하기 위한 알레고리다. 동시에 이 걷기의 땅은 현실의 어떤 시공간도 제대로 설명하거나 재현하지 않는다. 이 땅은 엄밀히 빈 무대도 아니며, 현실 바깥에 어떤 틈으로 현실이 뒤집힐 수 있음을 예시하는 정도로 현실을 벗어난다. ‘땅’은 비현실을 이야기하기 위한 게 아니라 현실에서 이격되는 신체, 가령 “우울”을 겪고 있는 존재의 여백 같은 것이거나 현실이 어떤 참조 체제로만 들러붙는 글쓰기의 상상적 공간같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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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기운, 〈콜타임〉: 균열의 시점, 공고한 일상과 혁명의 틈REVIEW/Theater 2022. 2. 28. 23:50
호랑이기운의 〈콜타임〉은 공연 전 무대 위에 펼쳐지는 상황을 노출한다. 조연출 은호와 배우 범순 두 여성 간 발생하는 이야기는 현장의 급박함 속에 페미니즘, 퀴어, 예술의 동시대성, 남성 중심의 정전 등 다양한 화두를 담아낸다. “공연에 참가하는 출연진과 스태프가 공연 전 극장에 모이기로 정해놓은 시각”을 가리키는 연극 용어인 “콜타임”보다 한 시간 일찍 도착한 두 사람의 이야기는 급격한 흐름으로 전개된다. 꽤 여러 번의 끈적한 키스 이후에는 급격한 논쟁으로 나아간다. 페미니즘에서, 결혼으로, 예술, 삶에 대해. 은호의 시선에 의해 이항 대립적으로 그 개념들은 분화된다는 점에서, 〈콜타임〉의 대화는 구체적인 차원보다는 이념적인 차원이 크다. 은호의 말 부분 부분은 퀴어에 대한 기초적인 그리고 이론적인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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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정 연출, 〈김수정입니다〉: 예술은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가REVIEW/Theater 2022. 2. 16. 18:19
효과로서의 종결과 의미로서의 종결 사이 〈김수정입니다〉는 김수정이라는 연출을 극단 신세계의 연출로서 극단의 시계열에, 그리고 극단 이전에 김수정의 연극사 안에 배치한다. 김수정의 실제 서사를 전면에 드러낸다는 점에서, 나아가 이를 인터뷰 영상의 서술을 동원하는 가운데, 극단 연출이 실제 극 전반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극 형태가 아니라 뉴다큐멘터리 연극이라 할 수 있다. 김수정의 등장은 서사의 핍진성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김수정의 전면적인 자기 고백이 수행적 발화로 나아가는 데 필요하다. 이 등장 전에 김수정의 시상식 주인공으로서의 모습, 디렉션을 하는 연출로서의 역할이 극 안에 어정쩡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면, 이후 김수정은 그 바깥에서 단독자의 형상으로 발화한다. 곧 김수정의 마지막 발화가 갖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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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Y, 〈탈피〉: ‘바깥의 언어’REVIEW/Theater 2022. 2. 6. 21:34
인간의 부정성 연극 〈탈피〉는 사회의 부정과 억압의 피해 당사자 간의 유폐된 언어를 맞물리는 접점을 구성한다. 자신에게 성폭력 가해를 저지른 남성 교수가 있는 학교에서 동물의 열악한 환경과 조처를 방관하는 동물원으로 탈주한 소진(강서희 배우)은, 탈피하는 중에 멈춘 뱀(알비노 비단 버마 구렁이, 이하 뱀)에게 온 신경을 쏟는 존재로 출현한다. 멈춘 뱀의 움직임을 언어로 소생시킬 방법은 처음 출현한 동물 의학적 지식을 갖춘 전문가인 수의사(정대용 배우)에게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지식이 없는 그에게도 없다. 다만 이 뱀의 닫힌 시간을 자신의 폐쇄된 시간으로 번역할 수는 있다. 이것은 뱀의 언어를 매개할 수 있음―거꾸로 뱀의 언어가 매개될 수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뱀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그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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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명작옥수수밭, 〈메이드 인 세운상가〉: 현재의 그림자로서의 과거REVIEW/Theater 2022. 2. 6. 21:15
왜상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 효과 극단 명작옥수수밭의 〈메이드 인 세운상가〉(이하 〈세운상가〉)는 1986년 북한 수중 공격에 대한 위협에 대처한다는 명목으로 평화의 댐 모금 운동의 정부 선전이 한창이던 시기에서 출발한다. 거북선도 만들 수 있다는 풍문의 세운상가 주인들은 북한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는 잠수함을 만드는 데 머리를 모은다. 국가라는 거대한 이데올로기―1. 국가가 있고 내가 있다. 2. 북한은 주적이다.―에 부속하는 소시민의 맹신은, 실제 500톤 규모의 잠수함을 만드는 데 이른다. 목선을 주조하고 이를 타고 월북하려는 ‘믿음’을 지닌 주인공을 다룬 그린피그의 〈목선〉(2019)은 〈메이드 인 세운상가〉보다 빨리 왔지만, 〈메이드 인 세운상가〉의 지속하는 미래를 선취하고 있다.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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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진 극작, 〈머핀과 치와와〉: ‘인간을 가로지르는 무엇’REVIEW/Theater 2022. 2. 6. 21:07
〈머핀과 치와와〉는 미래 문명의 단면을 ‘라이카’라는 인공지능의 통제 아래 작동하는 단일한 시스템―사각형의 가를 두른 검은 고무판을 하나같이 종종걸음으로 이동하는 배우들은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이동하는 시스템의 부속으로서 자리한다.―으로 전제한다. 문학적 인간과 새로운 생명력을 가진 존재로의 변이는 이 시스템으로부터 삐져나온 인간적인 무엇, 문학적인 무엇을 보여주지만, 이 같은 존재들은 반동적이거나 체제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체제의 예외적 존재로 자리할 때 그 체제로부터 읽히지 않거나 증발하거나 죽는 존재에 그친다. 시스템에 대한 독해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을뿐더러 작업의 초점을 벗어난다. 시스템은 일종의 기능적인 표면에 불과하다. 라이카는 강력한 통치 장치 역시 아닌데, 타자가 아니라 자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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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XXY, 〈박민정과 최성철〉, ‘예술의 부재하는 몫’REVIEW/Theater 2022. 1. 20. 00:50
프로젝트 XXY의 〈박민정과 최성철〉은 메타 공연의 형식을 띤다. 이 공연이 공연임을 또는 공연이 아님을 주지시킨다. 공간 안에 편재된 객석을 기준으로 공간 이곳저곳을 유동하는 배우/퍼포머의 움직임은 제4의 벽을 가정한 극적 환경에서 현실의 배우라는 존재로, 공간 일부가 되는 퍼포머로, 다시 연극 이전 삶의 재현으로 변환되는 노정에 있다. 공연은 공연의 결락된 맥락 동시에 공연이 결락되는 맥락을 투여하고 공연을 전개하는 대신 회수하고 공연의 공백을 전시하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사회에서 직접적으로 온 몇 가지 아이디어가 절합되어 있다. 수십 차례 반복되는 “트랜스휴먼 오디션 지원 관리 부서”라는 대사는 이를 집약한다. 첫 번째로, 무언가를 넘어서다 혹은 초월하다의 뜻을 지닌 ‘트랜스’가 붙은 “트랜스휴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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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차의 범위: 픽션들〉: 연극의 발생REVIEW/Theater 2022. 1. 6. 11:38
무대 중앙에는 하나의 빈 의자가 놓인다. 〈오차의 범위: 픽션들〉은 두 명의 배우와 세 개의 의자를 가지고 하는 연극이다. 비정형적으로 놓인 의자들 사이에서 빈 중심으로 한참 놓여 있던 의자에 이지혜 배우가 앉고 이를 마주 보고 앉은 최순진 배우의 거리가 가까워지며 주변(부)의 이야기는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명확하게 만들면서 비로소 초점화된다. 〈오차의 범위: 픽션들〉은 연기-무대-이야기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실험이다. 최초의 화자인 김연재와 이휘웅에게 들은 이야기는, 명시되지 않는 누군가에게 들은 것으로 옮겨진다. 이야기의 개연성은 그 이야기의 당사자를 떠나 그 이야기를 옮기는 사람의 번역과 변질, 전용과 같은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남은, 유의미한, 그리고 납득 가능한 의미가 구성될 수 있느냐의 부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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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소사이어티, 낭독극 〈물 불 흙 공기〉, 서사를 생성하기REVIEW/Theater 2021. 12. 30. 01:26
〈물 불 흙 공기〉는 메타-서사를 가지고 읽고 투사하고 수행하는 메타-연극이다. 그런 의미에서, 〈물 불 흙 공기〉가 낭독극으로 열린 이유보다는 낭독극이어야 하는 이유를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할 듯하다. 낭독극은 보통 보면대에 대본을 놓고 읽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물 불 흙 공기〉 역시 그러하다. 낭독극에서 배우는 이 낭독을 처음 하는 것도 아닐 테고, 낭독극을 하기 위한 낭독을 한두 번 한 것이 아닐 것인데, 따라서 이는 이미 머릿속에 대부분 입력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기기 위해, 나아가 말하는 부분과 페이지의 글자를 맞추기 위해 대본을 봐야 하는 입체적인 행위의 설정이 필요하다. 또는 낭독극을 하는 외양을 재현하기 위해 대본을 중간중간 보는 것일 수도 있다. 최소한의 무대 혹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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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가슴의 발레리나〉: 가슴은 어떻게, 무엇을 발화하는가REVIEW/Theater 2021. 12. 30. 01:09
〈큰 가슴의 발레리나〉는 베로니크 셀의 동명의 소설을 각색해 연극으로 만든 것이다. 베로니크 셀이 실제 고전 발레와 라반의 메소드를 모두 경험한 이라는 점에서, 발레에 대한 일반 사람의 판타지 차원의 상징적 의미 이상으로 메타-발레적 접근이 눈에 띈다. 가령 발레를 예술의 시대적 문법 아래 구분하는 것이 그러하다. 모던과 포스트 모던의 구분, 그리고 실제 주인공인 바르블린 블랭의 고전발레에서 저드슨 댄스 씨어터로 넘어가는 삶은 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큰 가슴의 발레리나〉는 무대라는 환영과 현실의 격차를 무대 위 발레리나의 활공과 구체적인 서술의 차이로 구성하며, 극적인 대비 속에 전개한다. 발레리나의 움직임은 무용 그 자체의 실시간 전개보다는 그 무용이 전개되고 있음을 서술하는 장면의 차원에서 삽입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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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낙엽〉: 문학의 전술, 재현의 전략과 한계REVIEW/Theater 2021. 12. 26. 11:19
〈붉은 낙엽〉은 카렌의 딸 에이미의 실종 사건이 미궁으로 떨어진 일련의 시간이 과정 전반을 이룬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스릴러적인 또는 추리를 동반하는 드라마 극의 외양을 띤다. 용의자로 몰린 지미의 아버지인 에릭(박완규 배우)은 〈붉은 낙엽〉의 서술자로서 내면의 심리가 드러나는 유일한 존재라는 점에서, 그는 이 극을 하나의 이야기로 갈음할 수 있는 저자의 위치를 갖는다. 아들 지미를 의심하는 그의 점진적인 심리 전개와 그것이 깨어지고 난 결말에 가까운 시점에서 만신창이가 된 그의 형태, 그리고 이 모든 걸 아우르는, 곧 가장 처음에 모든 비극을 ‘깨어져 나가는 균형’으로서의 알레고리로써 압축적으로 선취하는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중간중간 삽입되는 그의 서술이라는 세 가지 존재 유형에서, 그의 인식론적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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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젤스 인 아메리카-파트 원: 밀레니엄이 다가온다〉: ‘과도기의 시대 정신’REVIEW/Theater 2021. 12. 26. 10:44
3막으로 구성되는 〈엔젤스 인 아메리카-파트 원: 밀레니엄이 다가온다〉(이하 〈엔젤스〉)는 밀레니엄을 앞둔 미국의 혼란스러운 배경을 동성애와 에이즈, 인종 등의 개념어가 떠다니는 가운데, 인물들의 심리 변화와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다룬다. 180도로 회전하며 변신하는 무대 위에 숨 막히게 쏟아내는 배우들의 대사들로 휴식 시간을 포함한 4시간의 러닝타임이 그다지 길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다. 다른 말로는 1985년 미국 당시의 컨텍스트를 파악하거나 이해하기 쉽지 않다―사실상 그것을 포기하게 만드는데, 연출의 방향은 그것이 그다지 중요한 무엇으로 다가오지 않게 만든다(이는 번역극의 어떤 과제이기도 하다). 손바닥 뒤집히듯 교체되는 양면의 무대는 어느 한 인물도 주도권을 갖거나 그 바깥을 조망할 수 없이,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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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스 피스〉, 메타 연극의 하나의 재현 방식REVIEW/Theater 2021. 12. 24. 10:56
〈마우스 피스〉는 글과 현재가 오가며 자연스럽게 시점이 전환되는, 서술과 연기가 중층되는 구조로 진행된다. 이는 리비가 데클란과의 만남과 그에 대한 묘사를 기초로 희곡을 완성해 나가는 극작가이기 때문인데, 이러한 글의 완결이 갖는 구조적 힘과 그것을 벗어나는 생명력을 갖춘 존재의 예외성은 극 후반에 이르러 극단적인 대립의 광경을 이루게 된다. 작가를 잠정적으로 그만둔 리비와 화가를 지망하는 데클란의 언덕의 만남을 시작으로, 데클란의 화가로서 길을 열어주고자 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글쓰기 역시 다시 시작하는 리비에 의해 데클란은 글의 주인공으로 들어오게 된다. 현실은 글을 위한 글감이 되는 셈인데, 결국 희곡이 완성되고 극장에 오르게 된다. 데클란의 입장에서 보면 리비는 자신의 삶을 착취한 셈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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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당모의, 〈터키행진곡〉: 존재들의 아우성REVIEW/Theater 2021. 12. 24. 10:56
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바다와 나비』, 신문화연구소, 1946. 존재의 이행 문자-발화와 이미지-움직임이 어떤 하나의 세계에서 정합될 수 있다면, 아마도 〈터키행진곡〉은 그와 같이 연극과 무용이, 또는 무대와 배우/무용수가 하나의 평면으로 흘러가는 또는 하나의 평면에서 출현한다는 점에서, 공연의 본원적 차원을 보여준다. 역할과 역할 간의 분리를 구획할 수 없다는 점에서 ‘존재들 간의 교환’ 또는 하나의 역할로 고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존재의 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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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마을〉, 급진적 우화REVIEW/Theater 2021. 12. 22. 18:21
〈어느 마을〉은 장애인을 위한 동시적인 언어적 번역의 전개에서 나아가 이를 서사의 내용으로 함입한다. 원형으로 배우와 관객이 함께 둘러앉은, 현위치는 “어느 마을”이다. 그 바깥의 외부인이 등장하며 이 마을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는데, 그 다른 마을은 수어를 쓰는 마을이다. 수어를 쓰는 수의사(홍선우 배우)는 이후 등장하는 그 마을의 심리치료사(박준빈 배우)가 수어만 쓰는 것에 반해 말도 같이 하는데, 이런 이중 언어의 전략은 이 연극이 좇는 어떤 이상적 가치의 형상을 띤다. 따라서 〈어느 마을〉은 연극의 언어적 보완 장치로서 스크린의 자막과 배우 옆에 붙는 수어 통역사가 은폐되기보다 적극적으로 가시화되듯 수의사의 모습은 그런 연극의 주의(主義)를 메타적으로 지시한다. 곧 연극의 전략은 연극의 이념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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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기존의 인형들》: 인형의 바깥, 바깥의 인형REVIEW/Theater 2021. 12. 22. 01:49
《기존의 인형들》은 이지형 작가가 인형을 만들고, 본인은 연출을 포기한 채 연출을 바깥으로 아웃소싱하는 형태의 기획이다. ‘기존의’ 인형들은 그래서 주어진 인형의 어떤 가능성들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공연이 오른 순서대로 김보라, 여신동, 이경성에게 이지형은 각각 “관절”, “감탄사”, “언어”라는 키워드를 던져주었다. 이러한 키워드들은 인형을 제시하는 것 외에 연출의 자율적 지위를 완전히 수여하는 규칙에 의해 작품의 주제와 직접 연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키워드들에서 각각 안무, 무대디자인, 연극을 하는 이들과의 희미한 연관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기존의 인형들》은 사실 2018년 신촌극장에서 처음 열렸고, 인형을 주고 연출이 작품화하는 개념을 이번에도 고스란히 연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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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미인, 〈내 일의 내일, 내일의 내 일〉: 예술가의 그늘을 비추다REVIEW/Theater 2021. 12. 1. 01:15
예술이 노동인가의 질문으로 시작한 〈내 일의 내일, 내일의 내 일〉은 인간의 유희에 대한 본능과 일상의 잉여 짓에 주목하며 예술의 범주를 일상으로 확장하려 한다. 곧 예술이 예술가 고유의 것이 아닌 인간 본연의 것임을 지시하는 것으로써 예술의 고립된 영역을 역설적으로 비판하며 예술가의 현실/법적 소외 또는 예술가의 예외상태에서 우리 모두 예술적 인간이라는 인식의 지점으로 도약한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매개자로서 예술가들은 담론을 나르고 그것을 상호 간의 몸으로 분배하는 자리를 가져간다. 영화 〈모던타임즈〉를 인용하기도 했지만, 〈내 일의 내일, 내일의 내 일〉은 톱니바퀴처럼 얽혀 들어가며 역할 간의 바통터치로서 분배, 말의 나눔과 움직임의 원환을 구성하는 놀이를 규격화해 수행한다. 마치 노동을 하듯 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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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각반응, 〈슈미〉: 드라마적 완성도와 동시대적 질문의 낙차REVIEW/Theater 2021. 11. 15. 12:43
〈슈미〉는 원작 ‘헤다 가블러’를 각색해 재창작한 작업이다. 원작의 주인공이 제목과 동명이었던 것처럼, 〈슈미〉에서 주인공은 헤다 가블러를 치환한 슈미가 된다. 〈슈미〉는 흡입력 있는 대사와 움직임을 갖춘 탄탄한 드라마로 관객을 몰아세운다, 슈미가 다른 인물들에게 그러한 것처럼. 일종의 가스 라이팅으로 볼 수 있을 타인의 심리와 행동을 자의대로 조종하는 슈미의 행동은, 소위 ‘피씨함’의 범위를 많이 벗어나 있으며, 고전이 갖는 인간의 “광기”나 “불안” 같은 심리의 근간을 떠받드는 것만으로는 동시대의 언어로는 과도할 것이다. (아님 이를 포섭하기 위한 또 다른 언어를 개발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슈미와 엮이는 인물들 간의 관계는 어떤 군더더기가 없다. 적어도 누군가를 조종하고 조종받는다는 인식을 갖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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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에이티브 바키, 〈보더라인〉: ‘무엇을’ 말할지가 아니라 ‘어디에서’ 발화할 것인가의 문제REVIEW/Theater 2021. 11. 7. 23:36
〈보더라인〉은 국경과 언어를 뛰어넘는 평화로운 국제 질서의 세계를 염원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념을 쌓아나가는 과정은 뉴다큐멘터리 연극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극장에 처음부터 자리한 한 명의 배우와 극장 바깥의 한국과 독일의 배우 네 명의 화상 연결이 비로소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마지막 장면―사실 그 전에는 기록된 영상의 범주가 어디까지인지 확인할 수 없어서 비로소 배우의 존재가 실시간으로 연결되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도 하다.―까지 과거의 기록을 교차시켜 쌓아나가던 공연의 존재 방식은, 리얼타임의 성격을 강조한다. 이는 결국 무대 위의 현존이 아닌 화면에 기록되는 배우들 대부분의 존재 방식, 현재의 이야기가 아닌 과정의 시간을 보고해 나가며 누적된 시간을 해명하는 한편 그 시간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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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빗홀 씨어터, 〈당신을 초대합니다〉: 경계 넘기로서의 초대REVIEW/Theater 2021. 11. 3. 17:33
〈당신을 초대합니다〉는 언어에 대한 분열로부터 출발해, 현상학적 타자의 호출로서 제목의 함의에 도달하기까지 매체의 변위에서 장소의 변위로 옮겨가며 체험의 층위를 달리하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특히 헤드폰을 끼고 모니터를 보고 앉은 중반까지의 과정이 무대 전면의 위치를 반전시키는 순간, 타자에서부터 내재적 차원의 경험으로 옮겨온다. 곧 우리가 타자를 언어적으로 정의하고 인식하려는 불가능성의 조건이 타자를 마주하기 위해 뒤틀린 우리의 신체에 직접적으로 반전되며 현상된다. 먼저 입방체로 구획된 무대에 종횡으로 빽빽하게 놓인 큐브들 위에 관객은 앉는다. 그 앞뒤 간격은 좁으며, 이후 몸을 틀어 뒤를 볼 때 옆의 관객이 곁으로 인식되는 조건으로 연장된다. 큐브에 앉고 그 옆에 걸린 헤드폰을 끼고 음성을 순전히 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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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혜, 〈로드킬 인 더 씨어터〉: 인간의 시점을 도륙하기REVIEW/Theater 2021. 10. 27. 00:54
〈로드킬 인 더 씨어터〉의 시작은 이 작품의 극장과 작품의 구조를 지시하고 장면을 예고한다. 공연의 입구를 확장한 시간은 이 공연의 윤리적 차원이 공연의 형식 자체가 되는 과정의 일환이다. 문자 해설과 수어 통역, 음성 해설이 한 덩어리로 흘러갈 것을 예고하며, 표기법을 통일하고 몇몇 기술을 간략하게 줄이기 위한 절차이기도 하다. 이 공연은 이제 완전히 다른 감각을 가진 존재들과 기존의 일반적 차원으로 간주된 존재들의 동거로서 체험된다. 이제 펼쳐질 세계는 우리와 언어 체계가 다른 동물들의 언어 체계이다. 물론 재현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동물들의 말은 극단적으로 그 양을 늘리거나 더듬거리며 지연을 발생시키거나 되돌아오며 누군가의 말인지 중요하지 않게 되는 또는 어느 끝을 지정하지 않는 시간의 늪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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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Y, 〈제1강: 거절하는 방법〉: 공동의 이야기로 외전을 이룩하기REVIEW/Theater 2021. 10. 25. 12:04
편지는 늘 미래를 향한다 〈제1강: 거절하는 방법〉은 자기계발의 일종으로서 인간관계의 요령 같은 걸 알려주거나 그래서 성공한 삶의 욕망을 추동하는 그런 유의 작품과는 거리가 있다. 그 제목만으로 그러한 시시콜콜한 관계 맺기의 기술을 보고 들어야 할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34살의 리아(강서희 배우), 선주(백혜경 배우), 현(강다현 배우), 미소(배선희 배우)가 17살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로부터 〈거절하는 법〉이 출발하며, 거절하는 것에 대한 변명의 궁핍함, 상대방에게 상처를 또는 실망을 안기지 않을까에 대한 죄책감 또는 불안감 등 온갖 걱정이 따라붙었던 존재라면, 곧 그들이 스스로의 언어를 쌓아 나가던 그리고 질풍노도의 성장기에 있던 존재임을 알게 된다면 그제야 제목에 무게가 실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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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철 연출, 〈순교〉: 폐허의 역사로부터 나아가기REVIEW/Theater 2021. 10. 19. 16:49
SF 서사를 유기적 공간의 아이디어로 실현하다 극장은 중앙과 중앙을 둘러싼 두 원형의 무대와 객석으로 양분된다. 관객이 바깥쪽 원형의 객석을 차지하면, 중앙의 무대는 배우들의 안정된 자리가 아닌 비어 있는 구간으로 주로 놓인다. 호시 신이치의 SF 원작 서사를 바탕으로 한 〈순교〉에서 맨 처음 등장하는 한 음습한 느낌의 발명가에 의해 저세상의 영혼과 교류할 수 있는 통신 장치의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 순식간에 온 세상의 사람들이 저승을 향해 목숨을 던지는 기현상이 발생한다. 간결한 공간 디자인의 영역에서, 이승과 저승의 경계는 처음 발명가가 저승의 아내에게 말을 건네는 때에는 무대 중앙 아래로 떨어지는 조명과 의자 사이의 간격이라는, 아주 좁은 물리적 영역으로 한정되며, 의구심과 미지의 영역에 있는 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