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The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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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 침묵과 어둠의 말-짧은 노트REVIEW/Theater 2016. 4. 29. 12:53
▲ [사진 제공=국립극단](이하 상동) 시종일관 전면에 투사되는 영상은 등장인물들의 일상을 클로즈업으로 잡고, 도시 풍경을 비춘다. 그것과 대비적으로 회색빛 무대와 인물들의 의상은, 건조한 사무 공간, 그리고 그것에 연장돼 그 속에 위치한 텅 빈 공간에는 말의 자리가 주어진다.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은 인물들은 각자의 시선으로 말을, 또 영상을 관찰하고, 그 말은 청자를 비껴나며 공허하게 공간에 울린다. 도입부에서 나온 샤워 실에서 이를 닦는 모습에서 소리는 영상의 바깥, 소리가 울리는 공간의 크기를 상정했다. 그러나 이후 영상의 소리는 단락되고, 다만 그건 여느 일상의 이미지 정도의 지위로 추락한다. 거기엔 관찰하는 이의 거리 두기와 함께 반복의 영원이라는 숙명이 쓰인다. 영상은 말이 없는 한편 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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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에이티브 바키 <그녀를 말해요>, '입체적인 복원과 정치적인 호명 사이'REVIEW/Theater 2016. 4. 29. 12:43
크리에이티브 바키, 대화의 기술/정치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라라고 했다. 이는 에서는 윤리적 심급으로 적용된다. 배우들은 세월호 유가족을 보고 들으며 그들을 우선적으로 연극적으로 '체현'하는 한편, 죽은 아이들에 대한 그들의 기억을 그들의 말이 아닌, 유가족을 통과한 목소리에 '접근'해 간다. 처음에 유가족에게 던진 다양한 질문을 답변에 대한 시간 없이 계속 이어 붙이는 장면은 유가족에게는 대단히 폭력적이고 무식한 행동인 듯 드러난다, 그들이 경황이 없는 가운데 그러한 생각을 종용하는 것과 같은. ▲ 공연 사진[사진 제공=남산예술센터](이하 상동) 마치 세월호 유가족을 연극을 위한 소재적 착취로 가져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이 행동 이후, 곧 이어 장수진 배우가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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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 봄, <셰익스피어 니즈유>(빌리 코위); 제작 방식 자체의 구현REVIEW/Theater 2016. 4. 7. 07:21
_공연 ⓒBilly Cowie 빌리 코위의 공연은 사실 하나의 공연 형식으로 엄밀히 파악되기보다는 하나의 공연을 만드는 과정의 방법론 자체에 더 방점이 찍힌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유럽 컨템퍼러리의) 좋은 작품을 들여오(고 이로 인해 예술 담론도 함께 주장/선언하)는 데 방점이 찍힌 초기 페스티벌 봄에서 어떤 작품을 콘텐츠화하는 데 있어 국내 예술 환경과 결부해서 그러한 작품의 살아남기 자체를 시험/실현하는 방식 곧 마치 지금 페스티벌 봄의 전혀 다른 기조가 징후적으로 이 작품에서 체현된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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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메테우스>: 고전을 더하고 빼며 현재에 비뚤어매기REVIEW/Theater 2016. 1. 10. 14:46
▲ 공연 모습 [사진 제공=산울림소극장] (이하 상동) 이 극에는 두 가지 응결 지점이 있다. '힘과 폭력의 시대에 미래의 정의가 그것을 심판할 것이다' 하고 곧 이어 등장하는 '이 모두는 흙으로 뒤덮이게 될 것'. 전자가 지금 현 시대를 반영하며 그에 대한 무력함을 은폐하고 저항의 기치를 올리며 쾌락을 관객에게 수여하는 전언 형식의 너무 가까운 말이라면, 후자는 모든 존재를 필멸의 삶으로 바꾸는 불멸의 역사라는 존재에 맹목의 심판을 유예하는 너무 먼 말이다. 역사라는 평평한 땅에서 모두는 평등한 이름으로 묻힐(호출될) 것이라는 이상은 (민중을 가로지르는) 정의의 심판론보다는 오히려 더 낭만적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프로메테우스의 본질적 존재론이 자리한다. 곧 그는 역사에의 어떤 의지 그 자체다. 순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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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형제다> 무엇에 대한 테러인가?REVIEW/Theater 2015. 9. 13. 03:08
사건의 재현 아닌 허구적 재생 장치의 내파 ▲ [사진 제공=세종문화회관] (이하 상돌) '나는 형제다', 곧 '나'를 일부 나와 유전자를 공유하는 혈연 공동체의 일부로 정의하는 이 말은, 나와 너의 공속 불가능성에 대한 가능성을 유예한다. 운동과 공부라는 스테레오타입의 구별로써, 또한 성격과 외모로써 그 차이를 선명하게 하는 형제의 모습은, 따로 또 같은 ‘더블’로 대칭 쌍을 이룬다. 그리고 이들은 실제 어둠보다는 사막에서의 생존의 은유가 더 분명해 보이는 고독한 방랑자로서, ‘살아남기의 방식’을 ‘함께 살아가기의 이상’으로 확장해 나간다. 곧 ‘형제에의 숙명’을 ‘형제로의 사명’으로 전치시킨다. 이 과정에서 적대적인 세상과의 관계로부터 나아가, 모두가 형제가 되(어야 하)는 넓은 범주의 ‘형제’ 개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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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가족> 희극적 전략 속 냉소적 우의REVIEW/Theater 2015. 7. 27. 16:30
▲ 포스터 에서 ‘안전가족’은 이데올로기 개념으로 사용된다. 가족이 사는 집이 안전한 만큼 바깥은 불안전함을 시사하고, 그러한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서는 바깥에 나가면 안 된다(는 신화를 구성한다). 단지 가장만이 외부 출입을 할 수 있으며 나머지 가족은 그 선을 넘지 못한다. 그리고 이 가족은 가부장적 위계에 의해 집에서 엄금된다. 밖은 불안전한 것일까. 바깥과 단절됨으로써 언어는 해체·재조립되고 사회의 언어 규약을 따르지 않게 된다. 애초 아이들은 라디오(미디어)를 통해 이상한 언어의 쓰임을 하달 받고 있는데, 우리가 아는 일상 언어에서의 기표와 기의의 불일치가 전제된다. 가령 ‘오토바이=박수’라는 식으로, 바깥과의 관계 맺기가 부족한 가운데 외부의 생명체로서 고양이 역시 핵폭탄이 된다. 하지만 기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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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다페르튜토 스튜디오>: 구성되는 연극, 발생하는 행위REVIEW/Theater 2015. 2. 13. 16:13
▲ 연극 [사진 제공=두산아트센터] (이하 상동) 다섯 개의 장/막/연극으로 이뤄져 있는 연극(들)을 통해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적극)은 연극 자체를 따로 또 같이 말하고 있다고 보인다. 첫 번째 연극()은 양 한 마리를 세며-정확히는 타자打字를 치고- 화면에서 하나씩 증가되는 수열로서, 숫자의 증가로 수식되는 양으로 지정됨을 관객은 인식하게 된다. ‘숫자+양’ 이후 무대의 구멍에서 양으로 분장한, 양의 역할을 맡은 배우가 나타난다. 제목을 따른다면, 한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의 꿈속에서 양을 세는 가운데, 각기 다른 기괴한 양이 나타나는 형국이다. 표면적으로 이러한 시놉시스(타자)와 나타남의 시차적인 합치는, 재활용 물품들과 절합된-곧 분장이라기보다 덧붙이고 껴안고 들고 하는 식으로 일시적이고 분절적인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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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 디스토피아>, 단순한 부정에의 열망인가REVIEW/Theater 2015. 2. 13. 15:33
▲ 디스 디스토피아_사진 김도웅 [사진 제공=컬처버스](이하 상동) 디스 디스토피아(This distopia)는 부정적인 장소, 디스토피아를 지시한다. 이것은 디스토피아라는 프레임은 무대를 구획한다. 곧 디스토피아라는 세계에 침잠·전염되기보다 이러한 디스토피아를 인지하는 주체로서 극을 바라보게 된다. 한편 ‘디스-디스’라는 발음/표기가 반복됨은 일종의 언어유희로 이해·인지 가능하며, 두 개의 ‘디스’가 자리바꿈을 하는 것으로 바라볼 수 있다. ‘this distopia’는 ‘dis-this-topia’로 볼 수 있고, 그에 따르면 이 부정적인 장소는 부정적인 이 장소로 전치되며, 전자가 저기의 부정적인 장소를 바라보는 이곳의 시선이라면, 후자는 여기 장소 자체를 부정하는 것에 가깝다. 이는 디스토피아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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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민 연출/즉각반응 <GOOD DAY TODAY>: 도시-기억을 유영하다REVIEW/Theater 2014. 12. 22. 13:53
‘연기의 바깥’에서의 양말복 ▲ 하수민 연출/즉각반응 , 출연 이영조(사진 왼쪽), 양말복(오른쪽) © 이재훈 [사진 출처=즉각반응 페이스북 페이지](이하 상동) 은 배우 양말복이 화자가 되어 ‘양말복’이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을 띤다. 이야기와 실재는 서로를 보증하는 듯하지만 실재한다는 통상의 양말복(의 과거)을 담담하게 서술하며 이야기 속에서 객관화시키는 양말복이라는 배우는 그 이야기에서 허구의 화자로, 파편적 역사의 체험들을 재구성하는 주체로 상정된다. 양말복이 캐릭터로 분함이라는 ‘연기’는 한 인물의 역사로의 편입의 이야기 형식과 구분될 수 없으며 그 ‘형식’을 유지하는 지지물이 된다. 양말복이 ‘양말복’을 이야기하고 그 경험을 입체화하는 방식에서 관객은 그 이야기의 허구성이 자율성을 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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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방식의 대화들> 리뷰: ‘방식’이 아닌 ‘대화’에 방점이 찍히다REVIEW/Theater 2014. 10. 24. 14:36
▲ 포스터 할머니의 삶-경험을 인터뷰한 것을 토대로 실존하는 이애순 할머니를 3명의 배우가 나누어 연기/재현(?)한다. 왜 인터뷰라는 방식인가, 먼저 ‘인터뷰’는 텍스트가 작가의 몫으로부터가 아닌, 다른 이의 삶으로부터 가져온 것임을 의미한다. 그것이 연기되고 재현되는데, 거의 할머니가 되는 성수연 배우를 예외로 둔다면, 실은 배우들은 배우 그 자체로 있어(더구나 남자이다) 할머니와의 거리를 갖고, 이것이 ‘연기되고 있음’(조금 더 진행되면 기록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데 더 가깝다. ‘몇 가지 방식의 대화들’이라고 제목을 새삼 상기하면, ‘몇 가지 대화의 방식’이 아닌, 이 이름은 곧 여러 방식으로써 할머니와의 대화에 도달하고자 함을 의미한다. 방식이 수단이라면 대화는 궁극적 목적일 텐데 오히려 이러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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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투명인간>: 벌레-괴물이 된 아버지-관객REVIEW/Theater 2014. 10. 21. 17:24
‘법 앞에서’ ▲ 연극 [사진 제공=남산예술센터] 아버지의 생신을 준비하던 가족은 암묵적 규약을 만든다. 그리고 아버지가 이들을 찾지만 이들은 정말 아버지를 외면(外面)하고, 그 경계의 외피를 파고들고자 하는 아버지는 계속 실패함으로써 단절된다. 그에게는 도달 불가능한 장벽이 있고, 더 이상 그것이 왜 그런지 알 수 없다. 어디서부터 잘못 됐는지, 그 스스로가 오인된 존재인지, 그 자신의 오인된 인식인지, 누구로부터 그것이 생겨나는지를 알 수 없다. 곧 투명한 ‘벽’이 생긴 셈이다. 마치 그 규칙의 동의와 시작 지점이 더 이상 그 기원을 찾을 수 없게 된 것 같은 시점에, 벽은 더 이상의 물리적인 실체로 드러나지 않아도 되었다. 그가 보이지 않는다는 건 더 이상 규칙이 아닌 사실이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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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먼지섬>, 무한한 시간의 영겁 속 혼재된 자아들REVIEW/Theater 2014. 3. 14. 14:37
▲ 연극 포스터 ‘먼지’는 시간의 축적이자 비가시적이며 실재적인 시간의 두께를 의미한다. 이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와 낯설게 놓인 현재 사이의 간극을 증명한다. 이는 직접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므로, 스님의 낯설게 변한 환경에 대한 인식 따위로만 드러난다. 스님이 이 낯선 환경에서 먼지에 쌓인 멈춘 시계를 작동시킴은, 그래서 지난 멈춘 시간에서 현재 시간으로의 이어짐은 사물의 먼지를 털어내는 것과 같이 낯선 시간을 깨우는 새로운 시작을 갖는 것 같지만, 시계는 단지 현재만을 지정할 뿐이다. 이 멈춰진 과거의 시간에 대한 환상과 새로운 시작이라는 환상은 매끄러운 시계의 작동으로 무화되고 종합된다. 이것은 극의 하나의 시작이다. 아들을 끔찍이 아끼는, 그리고 남편을 잃은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자신의 아들을 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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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혜 연출의 <모래의 여자>, '부조리한 존재 물음의 모호한 지속'REVIEW/Theater 2014. 3. 5. 14:10
▲ 모래의 여자(각 색 ‧ 연 출 구자혜, 출 연 윤현길, 백석광)_photo by 김도웅 긴 어둠, ‘도대체 이 공간은 어디인가’라는 물음은 작품의 시작과 함께 떠나지 않는다. 초반 어둠과 함께 등장하는 여자의 메아리-목소리, 그리고 이후 그것이 반복되고 지속되지 않는 엄밀히 언어가 되지 않는 소리는 가령 이 바깥의 신체가 아니며 어떤 음악적인 부분의 효과로서 장식의 초과적인 측면이라고 하기에는 조심스럽고 미약하다. 이는 이곳에 낯선 자로 자리하지만 그에게 낯선 자로 있는 여자의 무의식의 결로부터 연유하는가, 오히려 이는 이 노래로 둘러싸인 곳에서 나갈 수 없는 가운데 죽어나간 수많은 영혼의 것인가, 이는 그 둘의 바깥에 있는 반면, 그렇다고 그 바깥을 상정할 수 있는 것조차 아니다. 이는 모래가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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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코러스:오이디푸스>: '생생한 원작'의 구현...REVIEW/Theater 2013. 10. 18. 15:13
▲ [사진 제공=LG아트센터] (이하 상동) 는 더 코러스란 수식어가 붙지만, 당연하게도 소포클레스의 원작 『오이디푸스』의 2차 텍스트이자 동시에 수많은 2차 텍스트의 해석적 담론들에 대한 참조와 변형, 궁극에는 자유로운 해석의 귀결로 나아가는 헝클어진 내지는 또 다른 텍스트들과 달리 오히려 2차 텍스트로서 원전에 충실한 편이다. 한편, 그리스 연극에서의 주인공과 코러스의 위계적 분리 이전에 코러스가 갖는 높은 비중으로서의 역할을 회복하려는 시도가 합창으로서 갖는 말의 울림으로써 또 무대의 입체적인 재편의 지속으로써 극을 풍부하고도 다른 모습으로 표현하게끔 만든다고 볼 수 있다. 오이디푸스는 테베에 주어진 벌에 대한 죄의 원인을 (합리적으로) 찾고자 하고, 이는 원인과 결과의 인과론적 전제를 전제하며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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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F2013] <메디아 온 미디어>: 미디어의 재전유REVIEW/Theater 2013. 10. 16. 13:27
▲ [사진 제공=한국공연예술센터] 제목처럼 미디어로 중개‧중계되는 메디아에 대한 이야기다. 계속 역동적으로 달라지는 각기 다른 미디어 속 모습들로부터 취해 온, 흰색 프레임 속 장들의 변전은 일종의 역할 놀이이자 중계되는 쇼로, 그 사이에 그 역으로 분하는 장 바깥으로의 준비가 있다. 메디아에 대한 내용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또 다른 매체로 전해지고 있음을 메타적으로 구현하며 미디어 형식(의 달라짐) 그 자체를 보여주며 그 내용을 현실의 유비 관계로, 매체가 전하는 삶의 형식들 자체로 연장/확장한다. 이는 곧 ‘미디어는 메시지다’의 맥루한의 전언을 상기시킨다. 미디어 속 모습으로 연극을 꾸밈에 따라 미디어와 연극은 서로 간의 절합의 측면을 중간 중간 가져가게 된다. 메디아의 기자회견장으로 시작된 연극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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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광부화가들>: '예술(의 의미)'의 시차적 도착REVIEW/Theater 2013. 10. 11. 15:07
▲ 연극 [사진 제공=명동예술극장] (이하 상동) 일차 텍스트 곧 대본을 현재화하는 연극의 특성을 전제하면, 동시대성을 띤 작품은 단순한 재현 이상의 것을 넘어, 현재에 (정치적으로든 문화 비평적으로든) 유의미한 감각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1934년 영국 북부, 우여곡절 끝에 애싱턴 노동자교육협회에 속한 광부들의 미술 감상 수업을 맡은, 예술에 대한 어떤 편견도 배제하고자 하는 선생 라이언의 등장은 일견 이 작품의 초반을 카르페 디엠이란 개념을 우리에게 전파했던 의 로빈 윌리엄스를 떠올리게 한다. 반면 구체적으로 그가 전하는 예술의 의미는 작품의 의미가 주어져 있는 것(작가의 의도나 작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림을 보는 사람이 받아들이는 부분에서 발생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이미 바르트의 수용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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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알리바이 연대기>: '과거를 현재로 깁는 경험적/서사적 시선'REVIEW/Theater 2013. 9. 28. 00:46
▲ 연극 [사진 제공=국립극단] (이하 상동) 는 아버지와 아들의 시차적 삶의 재현을 한국 근현대사의 연대기의 큰 흐름으로 두는 가운데, 회상으로써 순간적인 에피소드들로 과거와 단절된 일상의 영속된 시간 안에 과거로부터 현재를 다시 깁는다. 이 회상의 형태가 현재에 머물러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 과거의 현전으로 나타나며 이는 현재를 재구성하게 된다. 마치 시간 여행을 떠나 과거를 현재의 시점에서 체험하며 혼합된 시간을 경험하는 역사 탐험의 교과서적 만화를 보는 것 같은 매체의 전이가 느껴진다. 이러한, 과거를 재현하는 이야기 형식‧현전의 양태‧혼합된 시간으로서의 측면은 를 그야말로 현재와의 연대를 맺는, 현재로부터 출발한 나아가 과거까지를 다루는 연대기가 되게끔 한다. 박정희와 동시대를 산 김재엽 연출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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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천개의 눈>: '존재의 틈으로서 미로'REVIEW/Theater 2013. 9. 26. 14:52
▲ [사진 제공=남산예술센터] 의 역사적 배경은 딱 해설에서 나온 짧은 정리 문구의 정도에 불과하다. ‘자로’의 심중 자체가 은유적 차원에서 미로이며, 이는 앞선 ‘타로’의 미궁이라는 환유적 차원에서 실제 지배되는 것에서 연유했음을 알게 될 때 이 미로는 관념의 차원으로 소환 가능한 그 무엇이다. 미궁은 고르기아스의 매듭처럼 단순히 끊어 버리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오히려 미궁에서 나오기 위해 그만큼의 섬세한 실 뭉치의 매듭을 다시 풀어야만 한다. 미궁은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 대상 차원이 아니며 나를 옭아매는 나를 전적으로 둘러싸고 있는 어떤 불가능성의 차원에서의 장을 가리킨다. 타로의 등골에 칼로써 간극을 벌일 때, 베기보다 서서히 그 심연의 틈을 더듬어 어둠의 아가리를 벌릴 때(이는 정확히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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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ONE DAY, MAYBE)>: 우리는 5.18을 다시 경험할 수 있는가의 문제의식REVIEW/Theater 2013. 9. 11. 12:20
(※주의: 공연이 진행 중이고, 작품의 미지에의 조우가 무조건적으로 중요한 공연이다. 작품의 내용에 초점을 전적으로 맞춘 것은 아니지만, 작품을 보지 않았다면, 공연 관람 이후 읽기를 권한다.) ‘언젠가’, 되돌아온 미래와 반복되는 과거 그리고 뒤늦은 현재 ▲ ⓒ남지우(Jee Woo Nam) [사진 제공=아시아나우(AsiaNow)] (이하 상동), 참고로 실제의 차용과 인용 따위는 이 한 장면 외에는 오히려 없다고 봐야 한다. 이 작품이 5.18을 간접적으로 다루고자 했다기보다는 그것에서 미끄러질 수밖에 없음을, 그리고 새로운 시각에서 출발하고자 했음에서 이는 연유했을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라는 물음이 남는다. 나는 무엇을 보기는 한 것인가. 이 공연을 하나의 신체가 장소의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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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가>: ‘음악과 함께 하는 판소리’REVIEW/Theater 2013. 8. 18. 03:58
▲ 포스터 [=MJ planet 제공] 북극곰이 겪는 재난의 상황이 펼쳐진다. 이는 지구적 재앙의 비가시적 간접적인 영향권 아래 있는 우리의 실제적 무지한 순수한 인식(이들이 그 원인을 모르듯)에 상응하며, 반면 그 이면에는 책임과 결과의 엇갈린 적용 아래 우리가 그 책임을 인식 못하고 사는 것처럼, 그리고 그 환경 파괴의 결과의 시차적인 적용을 인식하는 가운데 인류적 재앙을 미리 목격하는 셈이다. 반면 그 결과 곰돌이의 죽음 및 그의 어미도 떠나고,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가며 ‘끝없는 끝’, 곧 ‘극적인 죽음’ 의 적막한 대기가 이어지며 창자도 떠난다. 그리고 이전의 무대에서의 고수가 피아노를 치고 창자가 되어 노래하며 역할의 전이가 발생한다. 만화적 프레임 안에 담긴 사진들이 컷의 미학으로 나타나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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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어터 백, <서바이벌 파라다이스>: '닮은 듯 다른 게임과 현실, 그 간극으로부터'REVIEW/Theater 2013. 8. 16. 05:48
▲ 씨어터 백, (연출 백순원) [사진 제공=씨어터 백] 두 명의 포옹하고(관계 맺고) 있는 배우, 그 앞에 ‘환상’을 품은 여자는 관객의 ‘퍼포머’로의 접속 지점이자 관객의 시선이 체현되는 부분이다. 이후 특이점은 말이 없는 퍼포머들이 구현하는 극적 세계의 양상이다. 4개의 큐브 사이를 이동하거나, 공간의 특정 좌표를 표시할 수 있는 영역으로 두고 ‘무인도’를 구현한다. 이 공간을 섬으로 환유할 수 있는 물리적 메커니즘은 바로 조명이다. 정확히는 암전을 통해 달라진 위치와 시간의 흐름을 손쉽게 가져간다. 이 무인도가 실제에서의 일상 너머의 ‘실재’로 갑작스레 건너뛰는 것이라면, 그러나 이는 다시 게임의 일부를 곧 현실에서 아바타를 상정한 것에 불과한데 가상을 현실에 앞세운 것이다. 가령 유난히 잦은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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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탁, 연극 <성북동갈매기>: '연극과 현실의 경계에 대한 재환기'REVIEW/Theater 2013. 8. 16. 03:33
▲ 극단 성북동비둘기, 연극 (연출: 김현탁) 는 기존 원작에 대한 재현 도식과 재현하고 있음의 메타 의식의 재전유 전략이 공존하며 실재와 가상의 경계를 끊임없이 전도하며 지속한다는 것에 유의해서 볼 수밖에 없다(이것은 포스트모던 이후의 연극의 한 대표적인 그리고 성공적인 전략이라 할 수 있을까). ‘트레프레프’는 무대 주변부를 어슬렁거리는 ‘니나’라는 짐을 떠안으며 무대 밖에 구질구질하게 정박해 있는가 하면 빈 무대를 두고 와 뜀박질로 그 부재를 오히려 드러내는 방식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강과 일상이라는 원작의 공간 관련한 알레고리는 무대와 (관객과 영역/무대를 공유하는) 무대 밖이라는 좁은 현실로 치환되는 듯싶다. 적어도 사각 프레임의 무대 바깥은 해안이라는 경계는 된다. 강은 이 무대 너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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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왕과 나>: '변전의 연기술'REVIEW/Theater 2013. 8. 16. 02:43
▲ 7월 4일(목) 두산아트센터에서 열린 연극 「왕과 나」 프레스콜 (이하 상동) 현재진행형으로 펼쳐지는 사건의 나열, 코러스 진행은 재현이 아닌 표현의 한 평면으로 융해되는 변전술을 이룬다. 관계의 장에서 형성된 말이 순식간에 독백으로 옮겨지며 달라진 상황을 인식한다. 배우들은 어쿠스틱 기타의 주선율 아래 코러스가 은근하게 더해지며 ‘공동의 안무’를 취한다. 가령 둘의 손을 맞잡음은 ‘표현의 층위’에서 펼쳐진다. 곧 두 사람이 허공에 손을 뻗고, 이는 두 사람이 이미 손을 맞잡은 것으로 ‘서술’에 의해 표시된다. 이는 은밀한 접촉을 더 넓은 공간으로 확장되어 감질나게 둘의 스킨십을 표시한다. 철 지난 트로트는 시대착오적이거나 퓨전 식의 덧댐이 아닌 이전에 ‘흘러가는 시간’, ‘지나간 것과의 조우’라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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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바이씨클 프러덕션, 연극 <거짓말 게임>: '치유적인 관계 맺기'REVIEW/Theater 2013. 8. 16. 02:19
▲ 블루 바이씨클 프러덕션, 연극 [사진 제공=블루 바이씨클 프러덕션] (이하 상동) 무대는 어둠 속 영화의 섹스의 신음소리만을 취한다. 이는 ‘택수’(김준삼 배우)를 자극하지 못하는데, 이는 그의 신체적인 증상인 단순 발기 불능의 실제적인 문제 외에, 소음으로 흘러가는 미디어의 과잉 정보와 그것의 자극적인 일면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현대인의 모습의 궤를 이루는 가상적인 부분과도 연관이 된다. 남자에게서 성욕은 그대로이되 발기는 일어나지 않는 모순적인 상황은 감각과 생각은 상응하지 않고, 감각은 또한 통제되지 않음을 어느 정도 도식적이고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실제로는 하지 못하되 생각과 입으로는 무한히 자신의 역량을 뽐내는 행동은, 지배와 통제됨,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적 의식에 사로잡힌 남자의 정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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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아시아 온천>: '유토피아에서 죽음으로, 다시 두 삶의 화해적 평면으로'REVIEW/Theater 2013. 8. 16. 01:47
▲ 연극 : [사진 제공=국립극단] (이하 상동) 왁자지껄한, 달뜬 분위기의 현장, 연주가 더해진 과잉-공간으로 시작된다. 위에서부터 내려온 줄은 서낭당을 상정한다. 무대 가의 밴드가 대기하고 있는 ‘열린 방식’으로 연극을 구현하며, 어둠과 빛의 환영적 경계의 표지를 만들지 않을 것임을 예상케 한다. 동시에 이 확 열린 무대는 카니발로 쉽게 변화 가능하며 연극이라는 것, 메타적인 연극의 규약을 지시하며, 변전의 가능성을 ‘자연스럽게’ 가져감을 또한 의미한다. 이 열린 공간은 이제 의미의 숨김과 드러냄의 급작스러움이 없다. 공간은 사람들로 채워지고 이 ‘총체적 구도’ 아래 말들은 자유스럽고, 발화는 다중의 텍스처가 중첩되고 한국과 일본 배우의 각자의 언어가 하나의 언어인 듯 통합되고 소통된다. 이 섬은 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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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왕은 죽어가다>: ‘죽어 있음과 죽음의 시차’REVIEW/Theater 2013. 8. 15. 23:08
▲ 연극 콘셉트 촬영 사진 [제공=극단 맨씨어터] (이하 상동) 왕의 자리에 앉는 것, 왕의 권위를 체현하는 것은 그의 신하 대리인이다. 곧 스모그와 불이 켜진 후 비로소 드러난 수족관의 기표는 왕의 등장을 알리는 효과다. 하지만 여기엔 어떤 간극이 느껴지는데, 왕은 그가 그를 보는 하지만 그가 보지 않는 그를 경외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의 눈치를 본다. 이는 물론 그가 왕이 아니었음에 기인한 것으로, 이는 왕이 완성되는 방식을 사유케 한다. 무엇보다 그가 왕으로서 드러났던 처음이나 그것이 아님으로 드러났을 때 역시 왕(의 모습)은 ‘왕’ 자체에게서 내재적인 부분이 아니다. 왕 바깥에서 왕과의 직접적 관계없이 왕이라는 형식 그 자체에서, 또 그것을 보존하는 그 ‘이외의 것’(그가 보지 않는 시선들)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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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8월의 축제>: ‘누군가를 이제는 놓아줘야 할 때’REVIEW/Theater 2013. 8. 15. 21:34
▲ 7월 11일 프레스리허설 장면 (이하 상동) ‘주영’(이시원 배우)의 존재를 담아내는 방식이 조금 특이하다. 주영은 죽었지만 아버지와 남편과 한 가족을 이뤄 생활한다. 한편으로 이는 죽었다는 것을 현실적으로는 더 인식하려고 하는 장인으로서 ‘광현’(손병호 배우)의 모습에서 감지되는 잊기 싫은 것은 사실이지만, 마음속으로 보내줘야 한다는 입장과 잊기 싫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죽었음 자체도 인정하지 못하는 그의 아들 같은 사위이자 젊은 남편인 ‘영민’(김민기)의 입장의 간극과 함께 꿈과 현실 사이에 있는, 곧 한편으로는 마음의 작용, 또 한편으로는 실재라는 두 다른 신념의 차이로써 그 존재는 드러난다(처음에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장인의 권유로 그 역시 심한 부정으로 그것이 마음의 작용의 영역이라는 것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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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물탱크 정류장>: '묘한 의식의 변용'REVIEW/Theater 2013. 8. 15. 20:28
▲ 연극 리허설 [사진 제공=남산예술센터] (이하 상동) 의식은 방기된다. 침대 위 자유로움, 관객 자유로움은 구분되고, 서로가 서로를 닮아 있다.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주는 이벤트, 이 바텐더는 미세한 입자들로 날아간다. 분해된 섞임과 섞임의 이동, 그리고 부분으로서 치환되며, 어떤 내세울 수 없는 순차적 흐름의 일환으로 존재, 그리고 삶은 치환된다. 시작,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도 읽을 수 있는 내레이션은 마치 주체(화자)인 듯 말하지만, 극 세계를 벗어나며 일종의 매개자임을, 이 내레이션의 파악 불가능한 의미들의 흐름인 듯 그 목소리 역시 하나의 떠돎으로, 그리고 이 엇갈린 층위들의 불가능한 소통의 관계를 매개하지 않으면서 나아간다. 이 술집은 그리고 ‘물탱크 남’은 직접적으로 우연히 대응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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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레스테스 3부작>: '역사로부터의 사유', '운명의 수용', '복수 이후의 담'론REVIEW/Theater 2013. 8. 15. 20:26
▲ 게릴라극장 포스터 1막 극의 시작 전에 문지기가 자리한다. 그는 자신에게 부과된 쓰레기들과 함께 노숙자의 형상을 띠고 있는 한편, 신문(정보)의 무용함을 알리고, 극에 들어가기 전의 경계를 침묵으로써 비워 둔다. 현실의 힘듦을 체현하는 한편, 시간에 대한 집중과 그 경험, 발화를 직접 관객에게 건네는 형식을 가져가며 관객과 그 사이에는 침묵만이 있는 것이다. 나룻배의 사공이 되고 또 (관객의 사유를 대신하는) ‘사유하는 배우’로 분한다. 이야기로 들어가는 경계에서의 위치는, 두 참전 용사의 관객 속에서 진행하는 대화로 이어진다. 이는 다시 시간의 경계로, 이전의 이야기를 회상하고 사유한다. 이들을 통해 들여다 본 (트로이)전쟁은 이기고 죽고의 문제가 아니라, 곧 적과 동지의 문제가 아니라, 유예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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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어터 RPG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 '게임, 군중, 재현'의 엮음REVIEW/Theater 2013. 7. 30. 00:38
▲ 2013 마로니에여름축제 포스터, 씨어터 RPG 은 마로니에여름축제의 일환으로 열렸다. [제공=한국공연예술센터] 관객은 입장하는 게 아닌 한 군데 ‘모인다’, 이는 다시 흩어질 것임을 그리고 다시 모일 것임을 전제한다는 의미를 가리키고 있고, 한편으로 여기에는 군중 내지 무리의 어느 한 부분의 속성을 띤, 관객의 재전유된 위치를 상정한다. 곧 입장하고 연극을 보는 하나의 집단이되 개별적인 감상자로 자리하는 기존의 연극에서 관객은 주체로 호명되며 그룹화의 선택의 기로를 겪게 된다. 먼저 시작 전 반복되는 매뉴얼을 접하며 공연이 아닌 잉여 시간에 공연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 전자음(이를 화면에 나타나지 않되 그 내부로부터 그 존재를 가정하며 흘러나오는 ‘아쿠스트메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으로 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