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 <하이타이>(작/연출: 김명환): 역사와 진실이 갖는 무게…REVIEW/Theater 2019. 3. 12. 14:46
▲ 작/연출: 김명환 공연 사진 [사진 제공=두산아트센터] (이하 상동)(작/연출: 김명환)는 혼자 무대의 모든 시간을 채우는 일인극으로, 배우 김필은 프로야구 최초 응원단장으로 광주 해태 타이거즈의 호루라기 아저씨로 유명한 ‘임갑교’를 분하는데, 임갑교 분이 응원 관련한 생생한 일화를 포함해 아내와 아들이 죽음을 맞았던 굴곡의 역사를 연기한다. 실상 여러 역할과 신이 존재하는 일인극의 경우, 배우의 연기는 과도함과 소진을 낳게 되어 있다. 이는 무엇보다 에너지/신의 치밀한 분배와 계산에 따른 것인데, 배우가 느끼는 피로를 배우와 같이 느끼는 관객은 그 피로로부터 (벗어나) 어떤 지루함과 지겨움을 느낄 소지 역시 크다. 또는 그 한 명에 정박된 몸, 아니 무대의 제한적 다양함 속에서 배우에 대한 인정과 ..
-
디오라마비방씨어터 <언 강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 장치(로부터)의 서사REVIEW/Theater 2019. 3. 12. 14:33
▲ 디오라마비방씨어터(송주호 연출/무대디자인), (2019) 연극, 90분,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사진: 김진호) (이하 상동)극장 로비 공간은 주요한 무대가 된다. 아니 이것은 ‘거의’ 무대의 전체이다! 여기서 극장의 로비를 재현/수행하는 무대 공간이 실질적인 무대가 된다는 것은 전도된 발상일 것이다. 그렇다면 실질적인 무대는 끝끝내 비가시화되어 나타나지 않는 가설의 무대라는 것―이것은 곧 중대한 스포일러!―으로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짜 무대는 저 바깥에서 펼쳐지고 이곳은 로비 공간으로서 극이 전반적으로 펼쳐지기 이전의 전 단계로 보게 만드는 것은, 사실 이 작업을 보며 겪는 크나큰 혼동이자 믿음이다. 곧 극장이 진짜/다시 열리기 전에 뭔가 밋밋한 것 같은 극의 지난 밀도는 이제 극..
-
김혜경 안무 <자조방방自照房房>, 의자-신체의 불문율적 세계와 예외적 순간REVIEW/Dance 2019. 3. 12. 14:21
▲ 김혜경 안무 공연 사진 ⓒ 윤석무 의자는 신체와 닿는 움직임의 첫 번째 평면이자 신체의 연장이다. 김혜경 안무가/퍼포머는 의자와의 관계 맺음을 통해 안무를 구성한다. 의자는 하나의 공간이자 신체가 된다. 곧 신체는 그 위에서 현존하며―때로는 그 위에서 노닐며―그것과 접착되어 지속된다. 의자는 네 발로 땅을 딛고 서 있으므로 두 발을 뗀 상태에서 균형을 잡고 있던 김혜경의 첫 번째 시작 장면은, 위태로운 의자의 균형과 그것을 유지하는, 곧 의자의 균형을 위태롭게 하며 의자의 동적 균형을 보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의자와 신체가 가까워질 때 곧 의자로 신체의 균형이 쏠릴 때 의자와 신체는 모두 아래로 고꾸라질 위험에 처하며 동시에 신체와 의자는 하나의 신체를 이루게 된다. 반대로 의자와 신체가 멀어질..
-
허성임 안무 <넛크러셔(NUTCRUSHER)>: ‘균열적인’REVIEW/Dance 2019. 3. 12. 13:59
▲ 허성임 안무 공연 사진 한껏 엉덩이를 흔들어대는 것. 이것이 거의 전부라 할 안무는 필시 소진을 향해 가고, 소진의 변증법이라 할 뻗음과 침묵의 영원으로 수렴해 간다. 세 퍼포머는 마치 크로마키 기법을 시현하기 위한 신체 전체를 감싼 의상에서 출발해 하나씩 그것을 벗고 나체화된다. 가린 의상과 더불어 이들은 시종일관 얼굴을 돌리고 있고 따라서 신체의 대상화는 역으로 전도되어 불편한 감각을 맺히게 한다―시선이 지배할 수 있는 건 시선을 돌린 얼굴과 신체 양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지배할 수 있는 신체가 아닌, 기계적으로 프로그래밍된 자체 동력의 신체들이고, 이는 박자를 세는―주로 허성임이 중간에서 그 역할을 전반적으로 가져가는 듯 보인다―행위로써 이 움직임은 반복되어야 한다.이 박자는 이 안무를..
-
국립창극단 신창극 시리즈 3 <시>, 분위기와 표면의 이질적 종합REVIEW/Music 2019. 3. 12. 13:52
▲ 국립창극단 신창극 시리즈 3 공연 사진 [사진 제공=국립극장] (이하 상동)하늘극장의 열어젖힌 구조를 는 고스란히 가져가는 편이다. 블랙박스를 지향하지 않은 무대는 대낮 같은 밝음에 각종 사물들과 인물들을 노출시키는 전략을 펼친다. 시적 대사, 가사라는 것이 제목을 표면적으로 보증해 주는 반면, 실질적으로 그 넷은 어떤 캐릭터를 정의하지 않고 그 내용을 신체적으로 전달해주는 데 그친다는 점에서 일종의 순수한 매체 자체에 가까우며, 이는 다시 네 배우/창자의 실제 인물에 대한 감상으로 수렴된다. 여기서 ‘시’는 그것을 본질적인 것으로 규명하려는 내용이 아니라 네 명의 인물을 대등한 차원에서 분배/분리하는 측면에서의 텅 빈 형식에 가깝다. 따라서 관객이 정작 보는 것은 시적 대사가 만드는 서사가 아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