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철인 안무, <0g>: 속도를 체현하기, 그리고 이후의 것은.REVIEW/Dance 2019. 6. 28. 16:13
▲ ⓒAiden Hwang [사진 제공=국립현대무용단](이하 상동) 길게 줄을 돌리고 그보다 빠르게 달려 거기를 뛰어넘는 퍼포머들, 그리고 혼자 남아 그 줄을 돌리는 퍼포머. 전자가 바깥으로의 장력에서 시작된다면, 후자는 그 스스로가 칭칭 감기며 속도의 중심은 계속 변전된다. 두 장면에서 미치는/닿는 힘은 다시 음악의 출력으로 상승된다. 그러니까 는 현란한 몸 동작이 아닌 움직임의 속도, 그 속도가 어떤 힘의 작용 아래 구현되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순전히 물리학적인 몸의 방정식에 가깝다. 반면 힘껏 달리다가 어느덧 바닥에 누운 사람들을 홀깃 뒤로 보며 가는 남자의 시선은, 이 작업을 일종의 내러티브를 내포한 작업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의구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반사신경의 반응, 공..
-
이은경 안무, <무용학시리즈 vol. 2.5: 트랜스포메이션>: 리듬 생산―비워지며 채워진 몸REVIEW/Dance 2019. 6. 28. 16:07
▲ ⓒ목진우 [사진 제공=국립현대무용단](이하 상동) 신재희, 이은경, 피터 암페, 이 셋은 몸을 튕기며 계속 큰 숨과 동시에 소리를 뱉어내며 움직인다. 이러한 개별 단위의 무한한 반복이 작품 전체를 이루며, 그 단위들의 집적이 하나의 시퀀스가 되는 것, 곧 다른 시퀀스로의 전환을 이루게 되는 것이 이 무한한 움직임의 소진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은, 조금 중요해 보인다. 사실 이 전환의 순간은 계속 반복된 엇비슷한 자극에 따라 온전히 개별적인 것들의 차이로 인식되기 힘들다―하지만 그것은 분명 온전히 개별적인 것들의 차이인 것이고, 이를 지켜내는 것이 이 작업을 ‘지겹도록 잘’ 보고 있는 것이겠다. 그것은 거의 하나가 끝없이 반복되는 형상이다. 동시에 끊임없이 미세하게 지각 변동을 일으키..
-
이재영 안무, <디너>: ‘일상의 시공간을 무대화하기’REVIEW/Dance 2019. 6. 28. 15:30
▲ ⓒ목진우 [사진 제공=국립현대무용단](이하 상동)의 실험은 일상 자체로부터 움직임을 만든다는 것에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춤의 전형적 움직임 자체를 탈피하려는 데 그 궁극적 목적이 있는 대신 이 일상이라는 조건으로부터 자연스런 움직임을 무대로 확장시키는 차원에서 보는 게 더 맞다. 3명의 무용수는 일렬로 넘어지는 도미노의 부속이 된다. 이재영 안무가는 예전 둘이 짝지어 그 둘이 농구공이 되는 식의 퍼포먼스식 무대(물론 공연 형태로 짜인 것이었다. (2011))를 한 적도 있는데, 그에 비해 유기적인 사물의 양태를 띠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일상을 전유한 무대에서 그 속의 사물들로 도미노를 만들어 그 사이에서의 빈틈을 구르기나 등등으로 이어 채우는 식이다. 이 안에서는 온갖 잉여적 행위들을 안무로 재구성..
-
<Utopia : [고래]>: ‘유토피아는 어떻게 가시화될 수 있는가’REVIEW/Dance 2019. 6. 25. 12:42
IntroE-conscious Dance Project의 (신희무 안무/연출)는 크게 대별되는 두 개의 신(scene)으로 구성된다. 하나의 신에서 다음 신으로 넘어감은 바닷속에서 그 바깥으로의 이동, 그리고 개체에서 사회로, 의태적 움직임에서 집단적 몸짓으로의 변화를 상정한다. 무용수들은 공간에의 분포를 통해 형태를 만들고, 이어 공간 속에서 사회적 신념 체계를 이야기한다, 또는 공간을 하나의 사회로 상정한다. 이후, 그에 대해서는 주로 움직임이라는 몸의 매체적 쓰임에 대한 묘사에 기초하기로 하자. #1.▲ 신희무 안무/연출, E-conscious Dance Projectⓒ김덕원[사진 제공=E-conscious Dance Project](이하 상동)인트로에서 신수연의 모습은 고래를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
<명왕성에서>: 책임질 수 없는 판타지!REVIEW/Theater 2019. 6. 20. 21:41
▲ (작,연출 박상현) 포스터 는 세월호 당시를 정리하고 죽은 자의 목소리를 재현하는 차원에서 징후적이다. 이제는 그것을 거리를 갖고 볼 수 있는 시점에 이른 것일까. 결론에 이르러 ‘명왕성’은 그 죽은 자들의 발신지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로부터 그들의 안부가 전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애도 불가능성’이 소실되어 가는 작품은 그 자체로 비정치적이며 무지의 판타지를 구현하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의문을 안긴다. 그러한 판타지를 통해 이 작업은 신파에 도달한다. 저 작업을 보며 울고 있는 당사자들을 부정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 반대로 이 작업의 발신 방향이 즉물적으로 당사자성에 쉬이 기대고 있음으로 되돌이켜 그 의도를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곧 그러한 위로의 효과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그 방식과 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