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e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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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미·허성임 <튜닝>: 연대의 틈 그리고 바깥의 언어들REVIEW/Dance 2014. 12. 9. 08:49
▲ 장수미·허성임 [사진 제공=LIG문화재단](이하 상동) 장수미·허성임의 지난 작품, 필리아(philia), 곧 우정을 통해 타국에서 두 무용가의 따로 또 같이 하는 활동들에서 나오는 느슨한-지속적 연대와 그 공연들에 감응을 시험·실험하던 전작의 현장을 이어, 둘의 만남에서 이번 작품은 그들의 어떤 좌표를 그 역사에 또 그들 몸에 ‘새김’하는가. 아님 기실 전적으로 다른 실험인가 또는 유사한 어떤 짧은 호흡으로 그것과 가깝게 위치하는가. 텅 빈 무대에 전자-기타 한 대는 연주에 대한 기대-상상을 가능케 한다면 한다. 그 기타를 손 대고 연주하며 소리 울림의 무대를 만드는 대신, 그들은 그 바닥에서 단지 그 파장이 소리로 치환되는, 사운드 역학 장에서 감응돼 버리거나 그것을 적극적으로 구성하는 위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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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영/이민경 <운동장>, 극장 발생의 기각, 그리고 극장의 계몽REVIEW/Dance 2014. 12. 5. 00:12
움직임에서 움직임 바깥으로 ▲ [홍은]입주예술가창작발표-모모한 예술 [출처=운동장 페이스북] 우선 ‘운동장’이라는 움직임/시간의 실제적 은유의 (작품에 대한 콘셉트에 나오는) 제목-일상으로의 확장이라는, 너른 극장 발생 내지는 춤의 너른 범주, 곧 일상적 현재성을 의도한 것으로 보이는-은 멈춤의 태(怠)만한 업(業)무의 선언(드러냄)과 연대에의 감응의 빈 터전을 만드는 것으로 변용됐음에서 이 공연에 대한 설명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곧 은 달림의 순환적 반복(-강박)의 형벌을 기꺼이 자기 동력으로 껴안는(이 공연에 참여하는 자신들에 대한 성토와 공감의 측면에서) 자본주의의 구조적 동력과 속도로부터의 거리 두기의 측면을 거시적인 차원에서 이상적으로 가져간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적이자 이데올로기적인 부정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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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자영 <기로극>, ‘텍스트를 직조하는 구성·편집의 교묘한 방식’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14. 11. 30. 01:00
시뮬레이션 ▲ 윤자영 (사진 제공=계원예대 현대예술과 퍼포먼스과), 이하 상동 기로극에서 ‘기로(棄老)’는 노인을 산속에 내다버리는 기로전설에서 따온 것이다(곧 예순 살과 일흔 살을 이르는 각각 기(耆)와 로(老)로 이뤄진 노인 세대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단어 기로(耆老)에 극을 더한 개념이 아니다. 한편 노인 유기를 다룬 이 극은 아들이 부모를 유기하다 종국에 그것을 포기하는 유명한 일화의 차용에 이르면, 인생의 기로(岐路)에 선 주체의 판단·선택의 측면에서 또 다른 기로의 의미도 함축하는 것으로도 읽히는 측면이 있다). 우선 하얀 스크린의 빨간 동그라미 앞에 세 명의 퍼포머가 섬으로써 독자적인 개체 단위로 구성됨을, 또는 디자인적 기호로 표상·전치됨을 보여주는 극은 아마도 세 가족 이상을 리서치한-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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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준 <또 다른 달 또 다른 생>, 시각과 촉각적 청각의 분별을 시험하다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14. 11. 3. 18:51
▲ 권병준 [사진 제공=LIG문화재단] (이하 상동) 권병준의 작업은 일종의 여기 없음과 거기 있음의 해체적 감각과 감각의 재구성에 가깝다. 이는 스피커를 통해 구현되는데, 가령 외줄을 타는 남자의 움직임이 사운드를 낳지만, 이는 그가 짚는 지팡이가 닿는 바닥 자체의 사운드 인식을 통해, 그의 현존이 장소적 감각으로 보증됨으로써 그 포인트가 옮아간다. 갖가지 사운드 장치들을 작동하면서 그 앞, 낡은 라디오라는 매체를 통해 그것들이 통과하는 것 역시, 사운드에 물질적인 좌표를 입히며 ‘여기’를 벗어나게 하는 방식으로 보인다. 연주를 하는 이의 몸은 무대 내에 존재하지만, 그 사운드는 공간 전체에서 그것과 외떨어져, 또는 다른 지점에서 반향이 되어 스피커를 울리기도 한다. 이는 소리가 장소적으로 감각 가능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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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방식의 대화들> 리뷰: ‘방식’이 아닌 ‘대화’에 방점이 찍히다REVIEW/Theater 2014. 10. 24. 14:36
▲ 포스터 할머니의 삶-경험을 인터뷰한 것을 토대로 실존하는 이애순 할머니를 3명의 배우가 나누어 연기/재현(?)한다. 왜 인터뷰라는 방식인가, 먼저 ‘인터뷰’는 텍스트가 작가의 몫으로부터가 아닌, 다른 이의 삶으로부터 가져온 것임을 의미한다. 그것이 연기되고 재현되는데, 거의 할머니가 되는 성수연 배우를 예외로 둔다면, 실은 배우들은 배우 그 자체로 있어(더구나 남자이다) 할머니와의 거리를 갖고, 이것이 ‘연기되고 있음’(조금 더 진행되면 기록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데 더 가깝다. ‘몇 가지 방식의 대화들’이라고 제목을 새삼 상기하면, ‘몇 가지 대화의 방식’이 아닌, 이 이름은 곧 여러 방식으로써 할머니와의 대화에 도달하고자 함을 의미한다. 방식이 수단이라면 대화는 궁극적 목적일 텐데 오히려 이러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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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진 <유용무용론>: 춤의 의미와 당위, 그 혼란으로부터REVIEW/Dance 2014. 10. 21. 17:41
▲ 최은진 [사진 제공=LIG아트홀] 최은진 은 유용한 것을 일상의 노동/행위로 두며 그 대척점에서 무용(舞踊)을 무용(無用)함으로 치환한다. 그리고 이 무용(無用)한 무용이 유용한 행위와 맞닿을 수 있는 지점을 모색한다는 식으로 이 작품의 테제를 선언한다. 그에 따르면, 그 말 이전에 발생한, 위성희가 객석에 있는 의자를 옮기고, 윤상은이 안무를 소화하는 두 대립된 장면은 춤무용론을 입증하는, 그리고 춤과 노동이 분절됨을 보여주는 작위적인 재현의 장이며, 앞으로 춤유용론의 경계를 만들어질 것으로 보이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한 것인가. 아니 그 당위 자체가 요구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노동과 춤의 유용함의 기준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오히려 춤이 사회적 기준에서 벗어나기에, 곧 유용하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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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무용단, 안무가 루이자 코르테시/미켈레 디 스테파노 공연 리뷰REVIEW/Dance 2014. 10. 21. 17:35
: ‘마법의 회전’으로서 안무의 마개 ▲ 연습 장면 [사진 제공=국립현대무용단] (이하 상동) 루이자 코르테시가 안무하고, 차진엽이 무용수로 출연한 은 각기 다른 뚜렷한 시공간을 상정하고 있는 가운데, 춤의 정면성을 내세워 일종의 윈도우로서의 프레임과 그와 맞닿은 표면에서의 신체적 감각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마우싱은 일종의 마우스를 가지고 윈도우를 작동시키는 행위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가상 세계, 그리고 그것과 상호 협응하는 인간 신체를 포괄적으로 지칭하기 위해 만든 조어에 가깝다. 그리고 사운드와 조명이 움직임과 긴밀하게 연관돼 시공간을 생성한다는 점에서, 그 장치(화)를 전면에 드러낸 것에 가깝다. 이로써 차진엽은 가상공간의 입자가 되는 셈이다. 차진엽은 우선 밀폐된 좁은 공간에서 로봇처럼 팔다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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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투명인간>: 벌레-괴물이 된 아버지-관객REVIEW/Theater 2014. 10. 21. 17:24
‘법 앞에서’ ▲ 연극 [사진 제공=남산예술센터] 아버지의 생신을 준비하던 가족은 암묵적 규약을 만든다. 그리고 아버지가 이들을 찾지만 이들은 정말 아버지를 외면(外面)하고, 그 경계의 외피를 파고들고자 하는 아버지는 계속 실패함으로써 단절된다. 그에게는 도달 불가능한 장벽이 있고, 더 이상 그것이 왜 그런지 알 수 없다. 어디서부터 잘못 됐는지, 그 스스로가 오인된 존재인지, 그 자신의 오인된 인식인지, 누구로부터 그것이 생겨나는지를 알 수 없다. 곧 투명한 ‘벽’이 생긴 셈이다. 마치 그 규칙의 동의와 시작 지점이 더 이상 그 기원을 찾을 수 없게 된 것 같은 시점에, 벽은 더 이상의 물리적인 실체로 드러나지 않아도 되었다. 그가 보이지 않는다는 건 더 이상 규칙이 아닌 사실이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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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 없는 미술관>, 미술관은 완전한 형상을 만들 수 있는가의 물음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14. 10. 1. 15:34
▲ 김지혜 [이미지 출처=국립현대미술관]http://www.mmca.go.kr/exhibitions/exhibitionsDetail.do?menuId=1020000000&exhId=201408060000100# 첫 번째 ‘인식장애극장’(방혜진 기획)의 에 이르기 전 두 가지 질문을 갖고 간다. ‘미술관은 안무를 구성/생성할 수 있는가?’와 ‘안무는 전시와 상충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는 각각 미술관의 극장화 내지는 퍼포먼스화의 역량, 그리고 전시 ‘속’ 안무의 실천과 함께 미술관의 전시품 보호의 임무/역량이 가능한가의 물음이다. 물론 이는 화이트박스 안에 블랙박스를 단순히 장착하는 것에서 조금 더 나아간 경우이다. 여기서 두 번째 물음은 전시장 안에서 퍼포먼스가 일어난다는 가정 하에 가능한 물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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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환 <늘 거울 생활> ‘적확한, 한정적 문맥의 교신’REVIEW/Visual arts 2014. 10. 1. 14:50
전시 (아트선재센터, ~11월 30일)은 관(람)객을 전시장 안에 포함시키며 개입시킨다. 이는 관객의 직접적인 참여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 관람 동선과 시각과 작품이 맞물리는 과정들을 체계적으로 구현했음을 의미한다. 제목에서의 ‘거울’이라는 알레고리는 난해한 듯 보이는 전시장 구성에서 관객의 위치나 시선, 비디오 작품에서의 이중적인 정체성 또는 균열, 수행으로서의 연기(演技) 등에서 나타나듯 실재를 보는 게 아니라 환영적인 체험을 통한 그 너머의 것을 나타나게 하는 어떤 방식과 연관되는 듯 보인다. ▲ Sung Hwan Kim, Watermelon Sons, 2014, Performance Courtesy of Sung Hwan Kim and Art Sonje Center, Photograph by 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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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 츄 (I will archive you)>, '자기 지시적 무용-텍스트의 저항과 망각'REVIEW/Dance 2014. 8. 23. 15:03
▲ 콘셉트 사진 [사진 제공=한국공연예술센터] 출연하는 세 명의 안무가(윤상은, 여민하, 최승윤)들은 각자의 작품들을 아카이빙하며 동시에 재현한다. 또는 그 두 개가 동시에 일어난다. 여기에 그 아카이브에 대한 발화가 더해짐으로써 정확히는 아카이브에 대한 시선과 이해의 지점을 만든다. 곧 예전의 작품들을 다시 보기re·view하며 그 작품에 얽힌 이야기를 서브 텍스트로서 동시적으로 포갠다. 작품은 이제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갖게 되며 해석이 가능한 유동적 텍스트로서의 위치를 점하게 된다. 이는 보통의 유기체적 무대의 구성과 그 흐름, 극적 시간으로도 불릴 수 있는 무대의 끊임없는 시간을 해체시키고 작품을 텍스트로 현재를 대화의 장으로 바꿔 아카이브를 아카이브화한다. 곧 예전의 작품들이 차곡차곡 하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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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 ․ 여름 ․ 민요>, 그 거침없는 컨템퍼러리의 민요-향연REVIEW/Music 2014. 7. 23. 18:23
무대는 그야말로 거침이 없었고, ‘컨템퍼러리’했다. 민요에 비한다면 판소리는 조금 더 문학적이며, 가곡은 대단히 엄숙하다,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기타와 각종 악기로서의 변용 능력을 갖는 신시사이저라고 할 수 있는 건반, 드럼의 더해짐은 퓨전이라기보다 전통 우리 악기를 새로운 판으로 접속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고 보인다. 특히 피리와 건반의 오고 감에서 두 개가 단속적으로 맞물려 어느 하나의 악기로 수렴되지 않는, 건반이 피리의 마개가 되는, 또는 피리의 증폭이 되는 어떤 연주의 한 부분은 측정하기 힘든 새로운 악기의 형태로 귀를 의심케 했다. 보컬 아니 소리 역시도 보통의 민요에서의 구성지며 조금 더딤의 속도로 체감되지 않았다. 어쩌면 민요란 그 익숙함의 형식이 너무나도 지나치게 다가오기에 ‘컨템퍼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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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시-나으 시대에 고함>, 무위의 스펙터클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14. 7. 17. 16:29
‘고(告)함’과 ‘고함(高喊)’ 사이에서. 으레 그 제목인 '25시-나으 시대에 고함'에서, ‘고함’은 단순히 어떤 사실을 알린다는 의미에서의 고(告)하다의 명사형이겠지만, ‘크게 소리치다’라는 의미에서의 고함(高喊) 내지는 ‘북을 치다’(鼓)라는 의미가 더해진 소리침으로 풀이 가능하다. 아니 어쩌면 그 후자의 의미가 더 적합한지도 모르겠다. 이는 구체적으로는 나의 시대에 알릴 무엇(message)이 있다는 식으로, 제목의 ‘에’를 ‘앞말이 어떤 움직임이나 작용이 미치는 대상의 부사어임을 나타내는 격 조사’로 상정할 때의 전자의 해석과 나의 시대의 고함(들)이라는 그 행위(의 성격)에 초점을 맞추는 식으로, 나의 시대로부터의 크게 소리침의 ‘고함’이라는 ‘에’가 ‘앞말이 시간의 부사어임을 나타내는 격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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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호 <유도>: '구상되는 이미지, 편집되는 순간의 파노라마'REVIEW/Dance 2014. 6. 4. 02:46
▲ 박순호의 [사진 제공=LIG아트홀] (이하 상동) 박순호의 는 유도를 재현한다기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도의 순간들을 떠올리게 하는 데 더 가깝다. 이는 그 이미지의 (머릿속) 맺힘이자 어떤 구상이다. 손을 앞으로 뻗고 메치기 직전 내지는 매침을 하기 전의 포즈는 정적과 맞물려 있다. 이것이 어디서 시작되고 또 순식간에 끝이 날지 모른다. 그 긴장의 무한한 연장은 곧 정적을 지정한다. 곧 이 시작의 지점을 모르기에 그 급작스러움(의 끝)은 긴 여운으로 빚어진다. 어떤 파동으로 물결친다. 그런데 이 여러 군상의 매치거나 매침을 당하는 어떤 두 가지 패턴적 전형의 존재들을 체현하는, 개성 없는 존재자들은 무대를 마치 유령처럼 떠돈다. 그리고 그 손이 어느 순간 거대한 힘의 촉수가 되어 타인의 몸 전체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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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MODAFE] DODOMOOV DANCE THEATER 이준욱, <No Response> '관계의 어떤 경계'REVIEW/Dance 2014. 6. 4. 02:34
▲ DODOMOOV DANCE THEATER 이준욱, [사진 제공=모다페] 몸을 사시나무 떨듯 가눌 수 없는 몸짓 언어를 가진 단독자(존재)와 그것과 유리되는 수많은 어둠의 빛 속에 존재자들이 있다. 이는 한 명의 여린 여자의 내면과 그 바깥에서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 사회에 있는 타자들의 환상물이 나타나는 형국으로 볼 수 있을까. 아님 그녀 이들을 무의식의 존재화되지 않은 무의식의 잉여 구문의 형상들로 봐야 하는 것일까. 한편 이 떨림의 주체는 말을 할 수 없다. 명확히 분절되는 언어의 성격을 구현할 수 없으며 단지 몸짓과 표정 등 온 몸으로 감각되길 요구하는 비언어적 언어만을 구사하는 것이다. 입을 벌린다는 것은 말을 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 정도의 충격과 고통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이는 히스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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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MODAFE] 황수현, <소설화하는 몸> '순간의 클로즈업'REVIEW/Dance 2014. 6. 4. 02:27
▲ 황수현 © 옥상훈 세 사람은 처음 “인”, “아웃”의 지정에 따라 스톱모션처럼 장면들을 분절하고 그 장면을 이루는 몸짓들을 분절한다. 전자가 일화적 기억상에서 재현의 단위를 이루는 일종의 서사를 이루는 영상이라면 후자는 그 영상을 더 분절한 아니 포착한 사진들의 환유물이 된다. 이 분절된 영상·이미지는 프레임들의 축적과 변환이라는 점에서, 한편으로 분절되어 현실을 이화시켜 보여준다는 점에서 스톱모션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인”하면 멈추고 “아웃”하면 시작한다. “아웃”에서는 달라진 장면이자 그 멈춤을 예비하는 움직임이 일어난다면, “인”에서는 그 장면이 멈춘 채 마치 1초 단위를 미세하게 쪼갠 전체 몸이 움직이지 않고 팔을 조금씩 꺾어 내려가는 등의 움직임이 일어난다. 이는 ‘순간(시간)의 클로즈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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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MODAFE] 블루 댄스 씨어터 김혜정, <The Song> '노래의 감상을 재현하다'REVIEW/Dance 2014. 6. 4. 02:23
▲ 블루 댄스 씨어터 김혜정, [사진제공=모다페]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들로 이어진, 이 무대는 그 노래가 갖는 다양한 감정의 양상을 선취하고자 한다. 이는 그 노래 자체를 체현하기보다 그 노래가 갖는 감응을 제시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그 노래의 힘을 고스란히 보여주되 그것에 다가서지는 못하게 된다. 피아프의 노래는 그 가사를 설사 다 이해하더라도 그 이전에 이미 그녀가 온몸으로 자신의 인생을 담아내며 부르는 목소리라는 점에서, 일종의 그녀 신체가 투영되는 환유이자 인생의 고귀한 에센스가 담긴 은유라는 기호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노래가 감응되는 것이다. 이 목소리는 철저히 신체적·물질적인 것이며 거기서 발생하는 (듣는 이의) 감정은 그에 뒤따르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움직임은 감정, 그 중에서도 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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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MODAFE] 김건중/하이디 비어탈러(하토 프로젝트), <Swift Shift>REVIEW/Dance 2014. 6. 4. 02:20
예전에 올랐던(이미 봤던) 작품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시간이 조금 더 짧아진 듯한 느낌이다. 땅에 붙어 순간적으로 몸을 틀거나 해서 오브제적인 구문이 되거나 무대 곳곳을 오가며 자신의 내밀한 기억들을 가능케 하며 그것이 확장된 공간에서 어떤 기억을 체현하는 신체 자체가 되어 기억-신체로 배치되어 가는 광경이 매우 실제적이면서 홀연하게 느껴지는 바가 있다. 막은 관객의 타인을 보는 관음증적 위치로 재배치하는 한편 우리 자신의 눈이기도 하다. 이 막이 닫히며 영상에서 구십도 회전한 이미지의 카메라로 벽 내지 바닥에 기댄 그의 움직임을 비추고 움직임은 착시적으로 변용되어 감각된다. 공간을 절취하는 카메라의 감각과 회전한 방향의 달라진 결과의 현시에 맞춰 몸의 움직임도 사전에 구상된 것으로 볼 수 있는 움직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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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MODAFE] 지경민/임진호, <불시착> '고블린 특유의 몸짓에 풍자를 더하다'REVIEW/Dance 2014. 6. 4. 02:17
▲ 지경민/임진호, [사진제공=모다페] 주체할 수 없는 몸의 떨림으로서의 두 벌거벗은 몸이 무대에 던져지는데, 이들의 움직임은 중심이 없는 해체되는 몸과 같다. ‘고블린’(Goblin Party)이라는 이들의 이름처럼 이는 도깨비를 나타내고자 한 것인가. 둘은 덜덜 떨다 둘이 덕석 서로를 껴안을 때 그 떨림은 멈춘다. 곧 서로에 대한 전적인 의지만이 이 외부적인 현상의 동력을 진정시킬 수 있다는 듯. 이 두 사람의 감응적 연대는 몸의 부분들을 포개 부풀어진 변형된 하나의 몸으로 둔탁하게 몸을 내려놓으며 전개해 가는 조형적 이미지의 양상을 만드는 것으로 전환되고, 또 수류탄을 무대 뒤 문을 열고 던지고 터짐의 충격까지 재현하는 등의 부산스럽게 무대를 누비며 현실의 파편적 재현의 구문을 만드는 것으로 이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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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MODAFE] 코타 키하라(Kota Kihara), <foot, foot step sound and step> '어둠이 스민 신체'REVIEW/Dance 2014. 6. 4. 02:08
▲ 코타 키하라(Kota Kihara), ©Kazuyuki Matsumoto 날벌레의 울음의 사운드와 으슥한 조명은 도시가 아닌 어느 시골, 숲과 가까운 자연 어느 곳을 환유케 한다. 어둠은 희미하고 그렇게 어둠으로서의 빛에서 어슴푸레하게 존재의 형상이 내비치며 시작되는데 움직임은 그 형상보다 형체로 또 소리화된 감각으로 더 드러난다. 반복된 쿵쿵거림과 이동, 구르기 등은 이 자연 안에서 홀로 내는, 홀로 있음을 드러내는 희미한 인광 그 자체다. 일종의 빛, 어둠이라는 공간에 뒤섞인 빛-형체로 등장해 그 안에 머무는 하나의 광경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곧 이 공간을 환유하며 신체는 그 일부, 그리고 독특하게 현시되며 자신의 환경 그 자체를 감각적으로 재배치하려는 어떤 시도들의 전개 양상으로서 드러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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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MODAFE] 안겸/주선희/최원석,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가?> '청춘의 맨 얼굴'REVIEW/Dance 2014. 6. 4. 02:04
▲ 안무가 주선희가 안겸, 최원석과 함께 결성한 창작 그룹 ‘모므로’ 이 셋은 청춘의 맨 얼굴을 드러낸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마지막 관객을 향한 채 조명을 받아 밝게 빛나는 얼굴의 현시에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중간에 한 번 더 앞을 향하는데 여기서는 어둠으로 넘어가는 중간에 있으며 어둠을 삶의 어려움, 특정 세대의 구체적인 어려움의 은유 자체에 직면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 세 사람이 일렬로 하나의 움직임을 만드는 과정은 서로의 존재를 감지한 채 미약하게 발을 내딛거나 어떤 소극적 외양의 제스처를 취하기도 하고 때로는 엉클어져 그들이 마주하는 삶에서의 실질을 순간화한다. 곧 추상화된 형태와 리듬의 분배 대신, 삶이 개입된, 각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또 공존하며, 그 바깥의 절대적인 현실에 대한 소극적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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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MODAFE] 레브 샤론 에얄/가이 베하르(L-E-V Sharon Eyal/Gai Behar), <House> '몸-스크린, 분절되지 않는 몸'REVIEW/Dance 2014. 6. 4. 01:43
▲ 레브 샤론 에얄/가이 베하르(L-E-V Sharon Eyal/Gai Behar), © Christopher Duggan, courtesy of Jacob’s Pillow Dance 알몸으로 감각되는 군무는 순식간에 무대를 덮친다. 몸을 분절해 그 안에서 리듬을 만들고, 접은 몸을 두 번에 걸쳐 연속으로 펼치는 뒷다리의 차올림의 어떤 정점을 찍는 광경은 짧은 황홀경을 선사한다. 곧 음악은 밖에 있지 않고 그 안에 있다. 황홀경(extase)이 사실상 나를 바깥에 두는 것이라 한다면 여기서 밖은 음악적 풍광이 ‘비치는’ 어떤 신체 자체의 들림에 의한 것이다. 음악은 양분되어 둥근 초점과 그것을 둘러싼 커다란 배경으로 작용하는데, 여기에 따라 몸들은 양분되며 다음 음악과 맞물리기도 한다. 어떤 하나의 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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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MODAFE] 박근태, <Man's Diary> '기억에 종속되는 신체'REVIEW/Dance 2014. 6. 4. 01:37
▲ 박근태 안무작 [사진제공=모다페] 단독자와 그와의 등가물들 격인 세 쌍의 무용수가 나온다. 그리고 존재의 기억이 펼쳐진다. 한 명의 존재는 지난날 자신과 연인이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내레이션으로 무대 뒤에서 목소리로 체현하고 세 쌍의 커플은 한 남자의 목소리를 재현하고 표현하는 일종의 부속물에 가까운 무용수들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럼에도 이 작품이 목소리와 움직임이 입체적으로 펼쳐지는 하나의 공간감적인 시가 아니며, 이천 년대 이후 국내에서도 하나의 담론과 이슈가 된 다원예술적 움직임이라는 특징을 지닌 작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움직임(표현)이 목소리(텍스트)를 앞서기 때문이다. 물론 화자인 존재가 본격적인 춤이 펼쳐지는 동안 등장하지 않으며 시작과 끝에만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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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40', 작업의 조건을 내세운 명명, 그리고 각자의 시점으로부터.REVIEW/Performance 2014. 6. 4. 00:11
‘800/40’은 자기 지시적으로 그들의 작품 세계와 작업 환경을 설명한다. 보증금을 가리키는 이 정직하고도 명확한 (어떤 보편적인 현실까지 포함해 그들의) 현실의 규정의 성격을 띤 명명은 그러한 조건을 환기시키고 또 그 자체를 끊임없이 인정하게 하며 어떤 중독으로 화해 간다. 그건 어느 순간에 ‘팔베개~’ 내지 ‘팔 베게~’ 사십으로 들리기도 한다(그렇다면 ‘살살 다뤄 줘’는 무슨 뜻일까). ‘시점 특정적’이라는 뜻은 도대체 무엇인가. 일전에 서울시립미술관 한 오프닝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구획을 정해놓고 더듬더듬 흠칫흠칫 움직이는 부자연스러운 이동과 리듬, 두더지처럼 고개를 뺐다 들어갔다 하는 단속적인 움직임, 전자 사운드의 믹싱의 결합은 사실상 시점을 특정화할 수 없는 맴돎 내지 끊김이었다. 이건 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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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주, <Unfaithful belief_삼신뎐> 리뷰: '상상계적 원형과 현실의 중간적 탐사'(레스빠스 71_Young Artist Compe 2014)REVIEW/Visual arts 2014. 5. 22. 15:20
▲ [사진 제공=레스빠스 71] , 네 개의 작품이 하나의 기둥 공간을 감싸고 합해지고 있는, 아니 하나의 작품이 하나의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유기적 표면의 조각들이다. 곧 신목을 동서남북, 네 개의 방위에서 바라보고 그렸으며 이는 네모난 캔버스의 틀로서 네모난 기둥과 절합되며 전시장에 나무의 상징 공간을 예시한다. 이는 실제 나무가 갖는 위치성을 재현하며 동시에 신목으로서 그에 대해 갖는 의식(儀式)의 의식(意識)을 체현하게 한다. 이 기둥에 상징의 힘을 가져오는 동시에 그것과 맺는 입체적인 위치 설정을 재현하는 것이다. 이 나무들을 보자 긁어내듯 음영을 만들어 그 두터움을 표현하는 한편 그 숲 같은 잎들의 뻗침이 예사롭지 않은 기를 형상화한다. 동시에 검게 음영진 중간은 동물의 가죽 같은, 그 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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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탈리콜] 이행준과 홍철기 퍼포먼스, '이것은 역사를 표상하는 것인가?'REVIEW/Performance 2014. 5. 20. 13:42
▲ 이행준,홍철기,_환상의_여학생_부대,_사운드_인스톨레이션,_16mm_필름,_2014 [사진 제공=일민미술관] 이행준의 16mm 영사기의 필름이 만드는 사람들의 영상은, 그 빠른 전환으로 인해 어떤 하나의 이미지가 기본적으로(지각적으로) 되지 못한다. 하나의 단위로 인지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어떤 리듬에 의해 멈추고 초점이 맞춰진다. 그리고 하나의 얼굴이 탄생한다. 이 얼굴은 역사적 자취, 추억, 푼크툼의 기본적인 영상이다. 하지만 이는 포착할 수 없음( 자체의 쾌락)의 효과에 가깝다. 이른바 속도, 망각의 쾌락. 실제 어떤 정서로 감응되기에는 너무 찰나적이다. 이것을 잡아두는 것은 그 위에 묻어지는 동심원의 확장·축소다. 이 크기의 넘나듦에 사진의 예기치 않은, 정확치 않은 초점을 맞추어 낸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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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전시: 한 시간을 증명하는 증인들의 소환REVIEW/Visual arts 2014. 5. 20. 13:04
▲ 《한 시간 전시(One Hour Long Exhibition)》(사진 제공=아트선재센터) (이하 상동) 지난 4월 8일, 저녁 6시에서 7시 사이에 열린, 《한 시간 전시(One Hour Long Exhibition)》는 한 시간 안의 전시를 구성해 낼 수 있는 역량에 집중한다거나 또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시간의 제한을 조건으로 두고자 하는 것(아마도 그렇게 유추되지만)만이 아님은 분명하다. 궁극적으로 전시는 그 최종 구성물만을 보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구성하는 한 시간 동안 일어난 모든 것이 전시라면, 일반적인 전시에서의 전시 설치의 행위와 그 흐름은 그 작품의 완성을 위한 단순히 기능적인 부분이거나 관객에게는 당연히 보이지 않는 부분이거나 부수적일 수밖에 없는 부분임을 벗어난다,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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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금형 <심폐소생술연습>, '존재와 사물 간 분열'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14. 3. 16. 17:01
(스튜디오M30, 2013년 12월 28일~12월 30일)은 정금형이 수면에 빠졌거나 의식이 멈춘 상태의 환자―더미―를 간호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전라가 된 채 그의 팔로 자신의 신체를 더듬게 한다. 의식이 죽은 상태에서, 감각 역시 작용할 리 없는데, 그에게 자신의 신체를 내어 줌으로써 환자의 팔로부터 어떤 생명의 기운이 마법처럼 돋아나는 듯한 느낌도 든다. 환자의 시선이 향하는 그 허공에서 관객과 마주한 정금형이 움직이지 않는 관객의 신체를 직접 애무하듯 “내가 싫어요?”란 말을 무심하게 꺼내 놓는 게 분기점이 되는데, 이는 죽은 이의 몸을 떠나 우리에게 즉각 전해진다. 어떤 기계음이 중독적 구문으로 의식을 맴돌고, 형광등이 아른거리는 가운데, 정금형은 죽은 자의 무의식과의 교호 작용을 유희적 몸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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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먼지섬>, 무한한 시간의 영겁 속 혼재된 자아들REVIEW/Theater 2014. 3. 14. 14:37
▲ 연극 포스터 ‘먼지’는 시간의 축적이자 비가시적이며 실재적인 시간의 두께를 의미한다. 이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와 낯설게 놓인 현재 사이의 간극을 증명한다. 이는 직접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므로, 스님의 낯설게 변한 환경에 대한 인식 따위로만 드러난다. 스님이 이 낯선 환경에서 먼지에 쌓인 멈춘 시계를 작동시킴은, 그래서 지난 멈춘 시간에서 현재 시간으로의 이어짐은 사물의 먼지를 털어내는 것과 같이 낯선 시간을 깨우는 새로운 시작을 갖는 것 같지만, 시계는 단지 현재만을 지정할 뿐이다. 이 멈춰진 과거의 시간에 대한 환상과 새로운 시작이라는 환상은 매끄러운 시계의 작동으로 무화되고 종합된다. 이것은 극의 하나의 시작이다. 아들을 끔찍이 아끼는, 그리고 남편을 잃은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자신의 아들을 빼..